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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얼어 있는 말들을 위한 시간 김지명 모자랄 게 없어 눈 밖에 몰랐다 초원은 어디든 빈집이었지만 눈에 불을 켰다 끄고 마는 풋풋한 마을이었다 푸르름으로 인심을 얻고 잃었지만 서두르지 않는 보행법은 쓸쓸함이 놀다 갈 등걸을 마련하는 것 빈 옆구리로 쏟아져 내릴 추억을 앓고 있는 것 익숙한 밤낮이 잘 숙성되었지만 먹지 않을 풀은 건드리지 않는 약시의 코뿔소 아무도 이상 기온을 말해 주지 않았지만 초원에 이만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한다 폭설은 처음 보는 먼지라서 괘념치 않았지만 차가움의 촉감이 풀 가시처럼 박혔다 한다 몸에 살지 않는 차가움으로 미쳐 날뛰었지만 이웃들 점호하듯 폭설이 짓밟고 갔다 한다 웅크린 이웃이 짧은 다리로 헤쳐 나가려 했지만 야크처럼 털이 없어 추위를 내치지 못했다 한다 추위는 정지된 세..

배웅

27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작 배웅 박청환 떨어지지 않겠다고 버팅기며 목놓아 울어대는 통에 십 리 오솔길 급기야 어미가 동행했다 장날 마실 가듯 어미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풀 냄새 맡다가 나비 좇다가 어느 순간 흠칫 놀라 겅중겅중 뛰어와 마른 젖통 툭툭 치받던 길 아가, 주인 인상 좋아 뵈더라 외양간 북데기도 푸짐하더구나 말 잘 듣고... 잘 살거라 낯선 외양간에 울음 떼어 놓고 돌아선 울음 달빛 앞세워 새끼 발자국 되밟아 오는 길 큰 눈에 별 방울 뚝뚝 1972년 충북 제천 출생. 수원대 행정학과 졸업 KORAIL 1호선 전동열차 승무원. 2017년 20회 공무원 문예대전 시부문 은상 수상.

반반 치킨 봄봄

반반 치킨 봄봄 홍계숙 사월의 취향은 꽃이면 꽃 이파리면 이파리, 선택이 딱 부러지던 삼월과는 사뭇 다르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사월, 배달된 벚나무 상자를 열면 꽃잎 반 잎사귀 반 치킨은 역시 양념 반 프라이드 반, 골라 먹는 재미 달콤한 꽃만으로는 속이 울렁거려 담백한 이파리로 비위를 달래는 중이다 달리던 연분홍 나무가 절반의 꽃을 비운 자리 잎사귀 초록초록 상처에 새살 돋아날 때 이별은 사월에 하자, 사랑이 절반쯤 남아 있을 때 벚꽃 엔딩 울려 퍼지는 거리 배달 치킨이 달려간다 동그란 꽃잎 흩날리며 흰털과 검은 털이 반반인 고양이 지나간다 새끼를 밴 어미는 어둠에서 꽃으로 건너가던 중이었을까 슬픔과 기쁨의 문턱에서 태어난 개나리 벚나무 복숭아 살구나무 사월 꽃나무역엔 꽃과 잎이 바삐 환승 중이다 얄궂..

유월의 관능

유월의 관능 유현숙 그랬다 선착장은 멀고 먼 바다 저편에는 먼 섬이 있다 신도는 저기 시도 거쳐 모도까지 섬에서 섬은 저만큼 떨어져 있고 떨어져 앉은 저만큼 먼 물길 건너서 닿은 섬 섬은 그랬다 바람이 붉고 해당화가 적적한 햇볕이 더운 땅에 좁고 가파른 오르막과 햇살이 미끄러지는 경사와 불쑥 내민 모퉁이와 수상하게 조용한 한나절과 한가한 거기에 늘 그렇듯 노르메기*가 있다 그랬다 가리지도 않고 쪼그리고 앉은 여자의 깊은 곳에 물빛 푸른 바다가 고이기도 여자남자는 겹쳐져 있기도 슬픈 남자가 슬픈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기도 했다 여자 위에 얹힌 남자의 등허리 위에 한낮의 태양이 누워 있다 탕 뫼르소**의 총소리가 들리고 바다는 그랬다 난자와 여자는 그랬다 외설과 관능과 미학의 상관관계와 대낮의 햇볕과 더..

그래서 늦는 것들

그래서 늦는 것들 류미야 아름다운 것들은 왜 늦게 도착하는지, 혹은 한자리에서 잊히기나 하는지요 날리는 저 꽃잎들 다 겨울의 유서인데요 그런 어떤 소멸만이 꽃을 피우나 봐요 사랑을 완성하는 것 물 그림자에 비친 언제나 한발 늦고 마는 깨진 마음이듯이 철들고 물드는 건 아파 아름다워요 울음에서 울음으로 서로 젖는 매미들 제 몸을 벗은 날개로 영원 속으로 날아가요 폐허가 축조하는 눈부신 빛의 궁전 눈물에서 열매로 그늘에서 무늬로 계절이 깊어갈수록 훨훨 가벼워지네요 시집 2020. 서울셀렉션 2015년 유심 등단. 시집

녹지 않는 눈

녹지 않는 눈 박은지 윗집 아이가 마을을 떠났다 발소리를 두고 떠났어 창밖엔 깃털처럼 눈이 내렸다 모두 꿈이라는 건 일리 있었다 어느 정도는 꿈이라고 믿는 편이 괜찮을지도 모르니까 주인을 잃은 발소리는 시끄럽고도 보드라웠다 무어라 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마을의 모든 귀를 모아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책을 뒤적이거나 스노우볼을 들여다보며 소리 없는 걸음의 행방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알고 있었어 한 계절 내내 꿈의 기록을 뒤져도 우리는 소리 없는 걸음의 행방을 짐작할 수 없었다 발소리는 폭설처럼 쏟아지고 아프면서도 차가운 그 발소리를 밤이 전부 지나가도록 받아 적었다 또 다른 발소리가 다가온다 꿈의 기록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온통 하얀 창밖으로 작은 발자국이 무성하다 다시 내리는 눈 시인수첩 2021년..

샤콘느

샤콘느 신은숙 법천사지 탑비 앞 합장 마친 바이올리니스트 활을 든다 무관중 콘서트 몰래 깃든 관중은 나만이 아니다 폐사지 가득 민들레, 연꽃 바람개비들 주춧돌과 새털구름 저만치 홀로 늙은 느티나무 지광국사와 부처님도 관중으로 오셨다 슬픔이 강처럼 흘러가고 무심히 빛나는 오후 보이는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보이지 않는 멜로디는 더욱 아름답다 부처님도 울고 싶은 부처님 오신 날에 *보이는 멜로디도 아름답지만 보이지 않는 멜로디는 더욱 아름답다:존 키츠. 시집파란 2020년 12월 1970년 강원도 양양 출생.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등단

옥상

출처:네이버포토갤러리 옥상 마경덕 도시의 옥상은 매력적이다 평수에 없는 땅을 배로 늘려 덤으로 준다 14평에 살아도 사실은 28평인 셈 하늘에 등기를 마친 건물의 꼭대기는 별도로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많은 옥상을 거느린 하늘은 비와 햇빛과 바람으로 옥상이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한다 집들의 정수리에서 상추가 자라는 것은 지붕을 싫어하는 옥상의 버릇 때문 오래된 이 습관 탓에 스티로폼 상자에 고추가 달리고 항아리에서 간장이 익는다 가끔은 쓰레기더미나 폐품을 방치하고 물탱크에 시신을 감추기도 했지만 그것은 옥상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닥다닥 달린 창문을 빠져나와 넥타이를 풀고 잠시 숨을 돌리는 곳, 도시의 숨구멍은 결국 이 옥상이다 사내들은 이곳에 와서 생사를 결정하고 하루를 충전한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한 잔..

슬픔을 줄이는 방법

슬픔을 줄이는 방법 천양희 빛의 산란으로 무지개가 생긴다면 사람들은 자기만의 무지개를 보기 위해 비를 맞는 것일까 빗속에 멈춰 있는 기차처럼 슬퍼 보이는 것은 없다고 까닭 모를 괴로움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시인 몇은 말하지만 모르는 소리 마라 오죽하면 슬픔을 줄이는 방법으로 첫째인 것은 비 맞는 일이라고 나는 말할까 젖는 일보다 더 외로운 형벌은 없어서 눈이 녹으면 비가 되는 것이라던 선배의 말이 오늘은 옳았다 빗소리에 몸을 기댄 채 오늘 밤 나는 울 수 있다 전력으로 시집 창비. 2021 1942년 부산 출생. 이대 국문과 졸업. 1967년 등단. 등 소월시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공초문학상, 박두진 문학상, 만해문학상 등 수상.

명사산

명사산 정이경 아마 동쪽에서 왔을 것이다 저 울음은 무릎을 꺾어 가면서까지 온전하게 제 등을 내어주는 늙은 낙타의 순종은 걷고 걸어도 사막 꿈속에서도 사막 자고 나도 사막일 것이다 일찍이 깃들지 못한 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현기증 나는 증발이 사방에 펼쳐져 있고 아직 도착되지 않은 내일이 성긴 가루가 되어 발가락 사이를 더 넓게 벌려 놓았다 움푹 팬 기억을 더욱 구부려 울음을 새겨 넣는 일은 바람이 시키는 일일까 거친 숨소리와 방울 소리 낙타의 느린 발자국마저 바람이 세우고 허무는 어제와 오늘 별 하나 귀를 세울 때마다 나는, 서쪽에 있었다 시집 걷는사람. 2020년 12월 1957년 경남 진해 출생. 1994년 등단. 시집 경남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