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녹지 않는 눈

폴래폴래 2021. 5. 28. 14:41

녹지 않는 눈

 

                     박은지

 

 

 윗집 아이가 마을을 떠났다

 

 발소리를 두고 떠났어

 창밖엔 깃털처럼 눈이 내렸다

 

 모두 꿈이라는 건 일리 있었다

 어느 정도는 꿈이라고 믿는 편이 괜찮을지도 모르니까

 

 주인을 잃은 발소리는

 시끄럽고도 보드라웠다

 무어라 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마을의 모든 귀를 모아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책을 뒤적이거나 스노우볼을 들여다보며

 소리 없는 걸음의 행방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알고 있었어

 한 계절 내내 꿈의 기록을 뒤져도

 우리는 소리 없는 걸음의 행방을 짐작할 수 없었다

 

 발소리는 폭설처럼 쏟아지고

 아프면서도 차가운 그 발소리를

 밤이 전부 지나가도록 받아 적었다

 또 다른 발소리가 다가온다

 꿈의 기록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온통 하얀 창밖으로 작은 발자국이 무성하다

 다시 내리는 눈

 

 

 시인수첩 2021년 봄호

 

 

 1985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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