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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는 제 이름을 오월 속에 숨겨두고

장미는 제 이름을 오월 속에 숨겨두고 이이향 지나간 사고는 면회 금지입니다 문밖에서 서성거리는데 끝을 알만할 때 모퉁이 팻말이 사라집니다 돌아가세요 제 가시에 찔려 통증으로 옮겨 간 오월 장미, 창백한 주름 서로의 가시 끝에서만 숨어 있는 미안하다는 말은 모퉁이조차 잃어버리고 순서를 정하는 건 다시 지금부터, 여기서부터 오늘의 가시만이 우리의 진심입니다 집에 가겠다고 집 밖으로 나가려는 장미 넝쿨은 내일은 몇 번째 사고가 되고 싶은지 변심하는 오월을 물끄러미 지켜봅니다 끝내 서두를 일이 하나도 없는 재채기와 같은 오월 속에서 철 지난 장미 차례는 지켜줘요, 아직입니다 2016년 계간《발견》 등단. 엔솔로지「목이 긴 이별」 공저.

축분을 뿌리며

축분을 뿌리며 신덕룡 모든 출구가 단단하게 차단되었다 오래된 이 냄새는 밀폐된 포대 안에서 몸을 부풀리고 뒤척이며 때를 기다리다 삽날에 콱 찍히는 순간 폭탄이라도 터지듯 사방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비좁은 축사에 앉아 되새김질하던 어미 소의 반쯤 뜬 눈 꿀꿀대며 머리를 들이밀던 돼지들의 콧구멍 저기 한쪽 구석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흘리던 눈물까지 질퍽거린다 오로지 먹고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고통을 다스리느라 속이 썩어버린 마침내 한 무더기로 쏟아놓은 생의 잔해들이다 길이란 길 다 무너지고 나서야 길 끝에서 발걸음 가볍게 다음 생이 도래한다는 듯 묵은 기억들 갈아엎고 환한 공중에, 서둘러 흩어지는 발자국들 소란하다 - 문예바다 2022년 여름호 1985년 현대문학에 평론 당선, 2002년 에..

요령 소리

요령 소리 장석원 그 사람 죽음 피하지 못하네 사랑할 때 발개진 얼굴 쟁강거리는 눈빛 오늘보다 아름다웠는데 그 사람 나보다 먼저 돌아가는구나 날 못 박아 놓고 못 간다 못 간다 나를 두고 못 넘어간다 산령 높아 갈 수 없는데 그 봉우리 밟고 그예 사라지네 발 없는 구름 연짓빛 노을 해 진다 서산에 해 빠진다 내가 잡아맸는데 서산 너머로 해 빨려 든다 서녘 미어진다 시집 파란 2020 시집「유루 무루」2021. 파란

바닥이라는 말

제33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바닥이라는 말 이현승 우리들의 인내심이 끝난 곳. 사는 게 도대체 왜 이러냐고 묻고 싶은 사람들은 하늘을 본다. 별 볼 일도 없는 삶이라서 별이라도 보는 일이 은전처럼 베풀어지는 거겠지만 사람이란 후회의 편에서 만들어지고 기도의 편에서 완성된다고 할까. 부드럽게 호소해도 악착스러움이 느껴지는, 그 많은 간구의 눈빛과 목소리를 신은 어떻게 다 감당하고 있는 걸까. 콩나물처럼 자라 올라오는 기도들 중에서 제 소원은요 다른 사람 소원 다 들어주고 나서 들어주세요. 하는 물러 빠진 소원도 없지는 안겠지만. 결국 우리가 발 딛고 선 곳 그러니까 풍문과 추문을 지나 포기와 기도를 지나 개양귀비 뺨을 어르며 불어오는 바람이 가까운 진흙탕 위로 내려앉는 것을 본다. 아무리 맑은 우물이라도 바..

피어도 되겠습니까

피어도 되겠습니까 - 동백 한영수 충분히 불안합니다 순간 쏟아질 한 사발 피에 아름다움이 붐빕니다 빨강의 내부를 열고 들어가 더 완고한 빨강에서 베어 문 빛깔로 지배받지 않는 단어로 꽃 피어도 되겠습니까 겨울로 격리된 심장 한 덩이 변방을 두드려 댑니다 아우성치며 눈발이 때를 맞추는 이런 밤에 이런 밤에 꽃을 가진 겨울에 대하여 겨울을 가진 꽃에 대하여 한마디 넘쳐도 되겠습니까 시집 2022. 파란 전북 남원 출생. 2010년 「서정시학」등단 시집

몽유의 북쪽

몽유의 북쪽 이정원 목련은 북쪽으로 봉오리를 연다 나의 북쪽도 그처럼 간절해 북망은 아직 멀다고 북향을 피해 잠을 청하는데 꿈마저 자꾸 북쪽으로 자란다 길몽과 흉몽 사이 궁극의 모퉁이 북쪽은 순록의 땅 내 머릿속 툰드라에도 순록 떼 밤을 치받는 뿔의 각도가 단호하다 북방 기마민족의 피가 내 혈류를 타고 질주하나 봐 무릎에 피는 서릿발, 발뒤꿈치에 굽이치는 찬 기류, 곱은 손등에 얼음을 가두고도 머리는 자꾸 북으로 기운다 강파른 유목의 땅 찬 별빛 눈 덮인 오미야콘 마을의 감빛 등불을 정수리에 건다 자작나무 우듬지에 핀 설원의 문장을 읽으며 아무르, 아무르, 시베리아 열차에 오른다 바이칼호를 차창에 두르고 서늘한 이마가 지향하는 쪽 길을 잡으면 내 몸속 얼음골 지나 순록의 뿔 치켜든 바람은 끝끝내 북향! ..

고드름

고드름 이현승 눈뜨고 죽은 사람이 아직 허공을 붙잡고 있듯 물은 얼어붙으면서 자신의 마지막 의지를 알린다. 떨어지는 것이 제 모든 행위였음을 그의 자세가 입증하고 있다. 캄캄한 어둠이 폼페이의 화산재처럼 내려앉은 밤사이 헐벗은 채 절규에서 기도까지 그대로 얼어붙었다. 뛰어내리던 마지막 도약의 눈물까지 녹아 돌이 되었다. 녹다 말다 얼다 말다 찬바람과 햇볕이 한쪽 뺨씩 번갈아 어르는 담금질에 고드름은 낙수 구멍 같은 무표정들을 겨누고 있다. 용서와 분가 함께 눅어붙은 얼굴로 떨어지는 속도와 녹는 속도 사이에서 뾰족하게 벼려졌다. 처마 끝마다 긴 고드름을 달고 있는 건물은 날개 끝에 핀이 박힌 나비 표본 같기도 하고 포박된 채 건져 올려 인양되는 선체 같기도 하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시집 ..

가을 근방 가재골

가을 근방 가재골 홍신선 그예 뒷산 너머 곤두박인 늦저녁 해가 견인되어 끌려 나갔는지 수습 중인 현장에는 널려 있는 깊이 깨진 구름들에서 뭉글뭉글 솟구치는 아픔 생리혈처럼 얼마나 붉고 선연한가. 마지막을 저 노을에 기대어 붉고 환하게 서녘 하늘 끝을 태워 지고 가는 저이는 누구인가. 이윽고 어스름 녘이 광폭의 걸개그림처럼 건곤에 걸리고 이 번민 저 아픔에 찔려 쏟아 낸 한 편 또 한 편······ 내 시에는 고스란히 지난 세월들이 고여 있어 마지막 내 모니터 화면에 환히 붉게 일렁인다. 머지않아 스무닷새 달 뜨면 놀란 억새들 목을 길게 뽑아 가을을 새삼 만난다는 듯 둘러볼 것이다. 철새들이 그림자도 없이 날아가고 그 울음소리들만이 이 골짜기 세상의 고막 나간 귀들을 구석구석 털어 나간다. 바람난 길고양이..

카테고리 없음 2022.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