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고드름

폴래폴래 2022. 7. 11. 10:57

고드름

 

            이현승

 

 

 눈뜨고 죽은 사람이 아직 허공을 붙잡고 있듯

 물은 얼어붙으면서 자신의 마지막 의지를 알린다.

 떨어지는 것이 제 모든 행위였음을

 그의 자세가 입증하고 있다.

 

 캄캄한 어둠이 폼페이의 화산재처럼 내려앉은 밤사이

 헐벗은 채 절규에서 기도까지 그대로 얼어붙었다.

 뛰어내리던 마지막 도약의 눈물까지 녹아 돌이 되었다.

 

 녹다 말다 얼다 말다

 찬바람과 햇볕이 한쪽 뺨씩 번갈아 어르는 담금질에

 고드름은 낙수 구멍 같은 무표정들을 겨누고 있다.

 용서와 분가 함께 눅어붙은 얼굴로

 떨어지는 속도와 녹는 속도 사이에서

 뾰족하게 벼려졌다.

 

 처마 끝마다 긴 고드름을 달고 있는 건물은

 날개 끝에 핀이 박힌 나비 표본 같기도 하고

 포박된 채 건져 올려 인양되는 선체 같기도 하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시집<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2021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활이라는 생각>

 <대답이고 부탁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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