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박순원
진주 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 소리
고개 들어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서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더라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터라
진주에 간다 진주성 촉석루 진주냉면 진주비빔밥 「토지」에서 대처였던 곳 박경리가 다녔던 진주여고 성선경은 마산에서 오고 조민은 다섯 시쯤 수업 끝나는 대로 술을 마시겠지 소주 맥주 회를 먹겠지 고기를 먹겠지 진주 진주 진주 같은 도시 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 소리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간다 광주에서 두 시간 사백 리 길 고속버스터미널은 남강이 휘돌아 볼록 튀어나온 곳에 있다 대합실 위층에 서점도 있다 진주고속버스터미널 이 층 헌책방은 신기하고 신기하다
진주에 다녀왔다 성선경을 만나서 어디에나 있는 뼈다구해장국에 진주막걸리 한 통 딱 두 잔씩 나누어 마시고 진주성을 한 바퀴 돌았다 촉석루 의암 논개사당 진주국립박물관 서장대 북장대 외국인 관광객 남강은 잔잔하고 군데군데 깃발들도 잔잔하고 금요일 오후 햇살은 나른하고 벤치에 앉아 커피도 마시고 성선경은 내년이 환갑이다
성벽을 따라가서 인사동 골동품상을 도는데 성선경이 문득 주인을 불러 저 새카맣고 반질반질한 반다지가 얼마냐고 주인은 고리마다 용머리를 새긴 반다지는 흔치 않다고 이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거라고 얼마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다고 나는 통영 김약국이 만드셨냐고 주인은 김약국을 좀 안다는 듯이 싱긋
진주중앙시장까지 걸어와서 오뎅을 한 개씩 먹고 국물을 한 컵씩 마시고
로타리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두 잔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성선경 웃는 소리 말소리가 카페를 쩌렁쩌렁 울렸다 노트북으로 뭘 하던 여자 주인이 가끔 돌아보았다 리필은 공짜 네 시나 됐나? 호텔에 들어가서 막 엉덩이 붙이려는데 조민한테 전화가 왔다 혁신도시 충무공동 우체국 앞 택시
나주 혁신도시에 한국전력이 있다면 진주 혁신도시에는 LH가 있었다 거대한 LH 틈에서 우리는 대방어 모듬회 다섯 시 반부터 서빙을 한다고 삼십 분 동안 물만 마시며 술도 없이 수다를 떨었다 나는 조민 같은 사람이 무슨 걱정이 있을까 싶었는데 무릎이 아파서 병가 냈다가 복직한지 일주일 관절염 수술받은 선경이 형 형수랑 필라테스 한의원 도수 치료 꽤 오래 통화를 했다
회는 쫄깃쫄깃 고소하고 달고 소주는 쓰고 맥주는 시원하고
조민 차를 타고 시내를 돌다 강변에 예쁘게 불이 켜진 찻집을 보고 내가 저기 좋지 않나? 했더니 조민이 친구 집이란다 들어가니 색소폰을 연주하고 포도주 발렌타인21 김밥 과일 치즈 계통 없이 펼쳐져 있었다 교감 선생님 유치원 원장 카페 설계한 사람 지은 목수 등등등 조민은 자기 딸 아플 때 많이 도와준 친구들이라고 했다 나는 꿈이냐 생시냐 일단 발렌타인부터 두 잔 따라서 마셨다 그리고 아무 술이나 아무하고나 따라 주고 받아먹고 정신없이 노는데 아뿔싸
성선경이 꾸벅꾸벅 할 수 없이 조민 차에 구겨 넣고 그 와중에 길치 조민이 호텔을 못 찾아 대충 내려주고 갔는데 맥주 네 캔 사서 이리저리 돌다 보니 아주 옛날같이 아가씨들이 유리창 안에서 아직도 이런 데가 있나 한참 쳐다보다가 호텔을 찾아들어 가서 맥주를 홀짝홀짝 성선경은 담배를 뻐끔뻐끔 뭐라고 신나게 서로 떠들다가 잠들었는데
나는 다음에 시집을 내면 제목을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로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무거나 써 놓고 시라고 우기는 정신 그 정신만이 시를 만든다' 서문도 써 놓았다고
제목도 있고 서문도 있는데 시가 없네 시가 없어서 시집을 못 만드네 물이 끓는데 라면이 없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나는 애면글면 제출한 논문이 게재 불가 반려되고 학교는 내년부터 오십 분 수업한다고 시간표 다 뒤집어엎어 뒤숭숭하고 아내는 백오십 이백 벌 데만 있으면 그냥 청주로 돌아오라고 나는 아무리 둘러봐도 백오십 이백이 어디서 나오냐고
우리는 한참을 같이 웃고 좋은 친군데 조민은 조민대로 성선경은 성선경대로 진주는 진주대로 시름이 깊고 각자각자 살다가 사는 중에 이렇게 만나서 그래 시라도 쓰기를 잘했다
하늘 같은 갓을 쓰고서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가는 나쁜 새끼들
나는 우리는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맑은 공중에 반짝반짝 널어놓고 잠시 걸터앉아 자기 무르팍을 주무르며
시집「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파란 2021년
충북 청주 출생. 2005년「서정시학」등단. 시집<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주먹이 운다><그런데 그런데><에르고스테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