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그녀의 서가

폴래폴래 2022. 4. 17. 09:46

 

 그녀의 서가(書架)

 

 

                            배한봉

 

 

 세상에는 불타올라도 타지 않는

 서가(書架)가 있다, 타오르면서도 풀잎 하나

 태우지 않는 화염도 있다

 나는 저 불꽃의 마음 읽으려고

 그렁거리는 차를 몰고 7시간이나 달려왔다

 층 층 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채석강 단애

 한때는 사나운 짐승처럼 시퍼런 칼날

 튀어나오던 삶이었겠다

 그럼에도 벼랑에만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새에게만은 둥지를 허락하는 여자였겠다

 악다구니 쏟으면서, 그게 가난에게 내지르는

 주먹질이란 걸 알았던 것일까

 가파를수록 정 많고 눈물 많은 달동네

 노을의 그 지독한 핏빛

 아 나는 기껏 몇 권의 습작노트를 불태우고

 한 세계를 잃은 듯 운 적이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저렇게 불타올라도 용암처럼 들끓지 않는

 그녀의 삶, 삶의 문장으로 채워진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가마우지새 되어

 그녀의 서가에 한 권 책으로 꽂힌다

 미친 힘으로 벼랑 핥는 파도도

 바다의 불꽃으로 피어나고

 비루한 삶의 풍경에까지 층층 겹겹

 한 살림 불의 문장을 새겨주는 채석강 노을.

 

 

 시집「육탁」여우난골. 2022년

 

 

 경남 함안 출생. 경희대 문학박사

 1998년 현대시 등단. 시집<흑조><우포늪 왁새><악기점>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주남지의 새들><복사꽃 아래 천년>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박인환문학상, 김달진창원문학상,경남문학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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