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축분을 뿌리며

폴래폴래 2022. 9. 3. 11:52

 

축분을 뿌리며

 

                     신덕룡

 

 모든 출구가 단단하게 차단되었다

 오래된 이 냄새는

 

 밀폐된 포대 안에서 몸을 부풀리고 뒤척이며 때를 기다리다 삽날에 콱 찍히는 순간

 폭탄이라도 터지듯 사방으로 뛰쳐나온 것이다

 

 비좁은 축사에 앉아 되새김질하던 어미 소의 반쯤 뜬 눈

 꿀꿀대며 머리를 들이밀던 돼지들의 콧구멍

 저기 한쪽 구석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며 흘리던 눈물까지 질퍽거린다

 

 오로지 먹고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고통을 다스리느라 속이 썩어버린

 마침내 한 무더기로 쏟아놓은 생의 잔해들이다

 

 길이란 길 다 무너지고 나서야

 길 끝에서

 발걸음 가볍게 다음 생이 도래한다는 듯

 

 묵은 기억들 갈아엎고

 환한 공중에, 서둘러 흩어지는 발자국들 소란하다

 

 

 - 문예바다 2022년 여름호

 

 1985년 현대문학에 평론 당선, 2002년 <시와 시학>에 시 등단. 시집<소리의 감옥>

 <하멜 서신> <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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