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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우수주의자의 하루

어느 우수憂愁주의자의 하루 이영춘 그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이 지나가는지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저장하는지 새 소리 물소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듣고 있나 보다 가끔 뭔가 생각하면서 희죽- 웃는 걸 보면 나는 그의 등 뒤에서 그의 가슴 한쪽을 긋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듣는다 어느 궤도에서인가 잘려 나온 푸른 이파리 같은 그의 목덜미 목덜미는 가끔 죽음으로 가는 붉은 신호등 앞에 망연히 서서 혹은 의자에 앉아서 귀에는 리시버를 꽂고 혼자서 엷은 창호지 같이 웃기도 하면서 죽음의 집을 짓고 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철학적인 말을 믿으면서 그는 그 완성을 어떻게 건너갈까, 가서 닿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의자는 하루 종일 무거워져서 쳐들 수..

영월 혹은 인제

영월 혹은 인제 이현승 아픈 마음엔 풍경만 한 것이 없어라. 안팎으로 찢어진 것이 풍경이리라. 다친 마음이 응시하는 상처 갈래갈래 갈라져 나간 산의 등허리를 보는 마음은 찢긴 물줄기가 다시 합쳐지는 것을 보는 무연함이라네. 거기, 어떤 헐떡임도 재우고 다독이는 힘이 있어 산은 바다는 계곡과 별들을 저기 있네. 크레바스 사이로 빨려 들어간 산사람처럼 상처 속의 상처만이 가만히 잦아드네. 찢긴 풍경에겐 상처 입은 마음만 한 것이 없어라. 외로운 사람의 말동무 같네 저 상처. 시집 문학동네 2021.9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파랑 아카이브

파랑 아카이브 신새벽 클랭*의 파랑을 표절한 바다, 울트라마린 이제 막 노을이 엎어진 갯벌에 모노크롬 터치들이 시작되고 있다 머뭇거림 없이 잡아채야 하는 속도전 파랑만 건져 올려 고요와 함께 봉합해 어둠의 서랍 속으로 밀어놓는다 붉은 얼굴이 반쯤 남았던 해는 빠르게 문을 닫아걸었다 해안선 철조망은 낯선 발자국을 경계하고 하얀 어깨를 처박은 폐선이 낡은 시간을 부비고 있다 해당화는 서걱서걱 모래를 씹고 난 아직도 파랑이 아쉬워 허기를 느낀다 누군가 흘리고 간 우울을 혹여 새의 깃털에 남아 있을지도 모를 불현듯 맨발로 걸어야 한다는 몸의 신호 상형문자 그려진 갯벌을 탐색하듯 걷는다 시나브로 어둠을 깨며 파랑을 채집하고 인화한다 스크랩하며 겹겹이 쌓아놓는 일, 에뛰뜨**블루 파랑의 혈통을 가질 수 있다면 내 ..

오므라진 나팔꽃 입

오므라진 나팔꽃 입 탑 4 이해리 할머니들 입은 오므라진 나팔꽃 같다 오므라진 나팔꽃 입들이 서문시장 난전 국숫집 나무의자에 앉아 국수를 먹는다 바퀴벌레 모기약 외치는 행상 옆에서 더럼을 타지 않고 천천히 흐르는 구름 같이 느리게 국수를 먹는다 하나같이 뽀글뽀글 볶은 파마머리, 헐렁한 옷 저승꽃 한두 떨기 손등에 피어난 나팔꽃 입술들 아기를 바구니에 담아 들판에 두고 모 심었던, 어쩌면 이 나라 적빈의 들판이 여기까지 오도록 맨몸으로 노역한 세대들 자신을 위해서는 국수 한 그릇도 아끼다가 저무는 나팔꽃 입술이 되고서야 한 그릇 국수에 노년을 맡긴다 가제 손수건 풀어 꺼내는 국숫값 삼천 원이 더디고도 더뎌서 연민의 넝쿨이 내 마음을 휘감는다 시집 2021.학이사 경북 칠곡 출생. 1998년 등단 시집 평사..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이영광 당신에게 도달하는 그리움은 없다 그리움은 내게로 온다 기름을 만땅으로 넣고 남쪽 바다 수직 절벽까지 가서 흰 갈매기들의 보행 멀리, 구멍뿐인 공중을 팽팽히 당겨 보다가도 시월 햇빛 난반사하는 끓는 가마솥, 그 다도해에 무수히 뛰어들어 보다가도, 그리움은 그리움의 칼에 베여 뒹구는 것 우리가 두 마리 어지러운 짐승으로 불탔다 해도 짐승으로 세상을 헤쳐 갈 수 없어 한 짐승은 짐승으로 남았으므로 칼을 녹여 다시 불을 만들 순 없다 제 골대로 역주행하는 공격수처럼 멍청히 뭉그적대는 귀경 차량들 틈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다급한 건 생환이어서, 같은 경기도계에서부터 저렇게 밀리는 것이리라 짐승을 사랑할 수 없어 당신이 두 마리 사람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 ..

들꽃

들꽃 정성원 함부로 자랐다 날카로운 햇살이 아무렇게나 찌르는 곳에서 바람을 타는 말은 음지에 뿌리 내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입술을 모으는 사람들 바람은 언제나 물기 많은 쪽으로 불었다 어느 방향으로도 소속되지 못한 내가 바람의 체온을 가질 수 있던 건 태생이 들판이어서라고 소리 없이 쓰러지는 이름을 가져서라고 잘린 삶이 절뚝이며 걷는다 바람에 선동당한 꽃잎, 하늘은 그대로 하늘이고 햇살은 그렇게 햇살이고 구름이 한가롭다 흔들리는 내가 파문으로 번진다 근사한 이름을 가지지 못한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겁의 겁을 건너온 시간이 방향을 비튼다 질긴 뿌리가 비로소 근원이고 비로소 내가 된다는 말 나는 들판에 모태를 두고 있다 그래서 함부로 살았다고 더 많은 바람을 맞을 거라고 들을 매운 내가 너머로 너..

경청

경청 가을을 데려다 며칠 살고 싶다 안부가 닿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 며칠 지내고 싶다 가을을 데려가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지만 데려다 발톱도 깎아주고 손때묻은 얼굴도 씻기다보면 말개져서 들여다본 내가 얼른 가을이 될 것 같아서 가벼움의 늙음에 대해 입 아프게 떠들다 가을을 더듬어보는 죄나 지어야겠다 죄를 지었으니 성자와 성부의 이름을 빌어 회개하다 내게 남은 막간이 없음을 알았을 때 가을 엉덩이 한 번 더 두드리고 땅의 기도소리나 엿들어야겠다 그 소리에 나는 부끄러워져 가을 머리카락을 따다말고 꼭꼭 숨어 가을만 훔쳐보다가 끝낸 기도처럼 누워 내안의 분란은 불태우고 가을의 분란은 내가 거둬야겠다 시집걷는사람,2020 2012년 애지 등단. 시집 2018년 김만중문학상 수상

어둠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박숙경 외다리로 서 있는 왜가리의 왼쪽 다리부터이다 낯익은 길고양이 신경을 곧추세우고 꽃마리 앞에 무릎 꿇을 때부터이다 징검돌에 닿는 물의 목소리가 커지고부터이다 물고기들이 배를 뒤집어 은빛으로 뛰어오를 때부터이다 북서쪽으로 번져가는 노을의 꽁무니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물기가 어린 순간부터이다 비행운이 사라지고부터이다 매천역을 통과한 스카이레일이 놀빛 속으로 빨려들고부터이다 비둘기 떼 지어 교각 아래로 숨어들 때부터이다 등 뒤로 번져오는 저녁의 서정을 차마 감당할 수 없어 하늘을 향해 입술을 삐죽이고 있는 이팝나무 정수리부터이다 하릴없이 마음 급해지면 보이지 않는 것마저 흔들린다는 걸 알아차리는 순간부터이다 아니다, 그대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였던 때부터이다 시집 2021,시인동네 ..

뷰 포인트

뷰 포인트 이현승 오후부터 내리던 비가 저녁 무렵 거세졌다. 양동이 비가 쏟아지는 베란다 창 저편 언덕 위 아카시나무의 우듬지가 휘청인다. 나무의 실루엣이 휘청이는 게 보인다. 나부끼는 아카시나무의 중간쯤에 까치집도 함께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나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궂은 날씨에 발이 묶인 사람처럼 나는 어째서 흔들리는 나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까. 옻나무 밭을 지키는 것은 장자의 직업이었는데 나는 버티고 서서 아카시나무를 바라본다. 비가 없는 마른날, 바람 없는 날에도 베란다에 서면 눈길은 언덕 위 아카시나무로 향한다. 그러니 뙤약볕에 목덜미를 굽는 것도 나의 일 온통 비를 맞고 서서 뿌리를 적시는 일도 나의 일 바람 속에서 몸부림치며 흔들리는 것도 나의 일이다. 아카시나무를 더듬어보는 일은 ..

자미화 그늘

자미화 그늘 유현숙 비는 기별 없이 와서 가까운 바다를 두들겼다 바닷가 절집이 물에 잠겨 있다 첨벙대며 마당을 가로질러 물 고인 돌계단을 딛는 발아래가 염화다 문득 비 그치고 꽃잎 붉게 지는 동안 하루가 저물고 절집이 고요하다 자미화 그늘도 본래로 돌아가 누웠다 은빛소리라든가 눈엽이든가 수첩에 적어 두었던 낱말들이 고요 속에서 낱낱이 눈 뜬다 미혹의 그늘에서 이만큼까지 몹시 잠기고 매듭진 자리에서 저만큼까지 몹시 마음이 들고난 자리에서 이만큼까지 몹시 지난 하루가 감감해지는 저만큼까지 몹시 절집에 저녁이 오고 어둠이 들고 가섭은 가고 떨어져 뒹구는 저 꽃빛 닿지 않은 기별인가 시집 상상인 2021 2001 동양일보, 2003년 문학.선 으로 등단 시집 제10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