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폴래폴래 2021. 9. 29. 09:47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이영광

 

 당신에게 도달하는 그리움은 없다

 그리움은 내게로 온다

 기름을 만땅으로 넣고 남쪽 바다 수직 절벽까지 가서

 흰 갈매기들의 보행 멀리, 구멍뿐인 공중을 팽팽히 당겨 보다가도

 

 시월 햇빛 난반사하는 끓는 가마솥, 그 다도해에

 무수히 뛰어들어 보다가도,

 그리움은 그리움의 칼에 베여 뒹구는 것

 

 우리가 두 마리 어지러운 짐승으로 불탔다 해도

 짐승으로 세상을 헤쳐 갈 수 없어

 한 짐승은 짐승으로 남았으므로

 

 칼을 녹여 다시 불을 만들 순 없다

 제 골대로 역주행하는 공격수처럼 멍청히

 뭉그적대는 귀경 차량들 틈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다급한 건 생환이어서,

 같은 경기도계에서부터 저렇게 밀리는 것이리라

 

 짐승을 사랑할 수 없어

 당신이 두 마리 사람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 내가

 두 마리 짐승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사 들고 온 비닐봉지를 헤쳐 뭔갈 또 우물거리는 밤

 당신에게 나눠 줄 그리움이란 애초에 없었던 거다

 혼자 갉아먹기에도 늘 빠듯했던 거다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던 무른 벌레를 눌러 죽였다

 나는 살기 위해 평생을 허비할 것이다

 

 

 1967년 경북 의성 출생. 고대 영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8년 문예중앙 등단. 시집<직선 위에서 떨다><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나무는 간다> 노작문학상, 지훈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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