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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이해존 죽어 있던 치아가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부러졌다 멈춰진 식탁 위로 햇살이 번지고 유리잔에 물방울이 맺힌다 공중에 떠 있는 투망이 물속을 향해 덮쳐 오는 줄도 모르고 피가 돌지 않는 이물감을 오랫동안 혀끝으로 두드렸다 두려움과 나는 같은 자리에 서서 남아있는 시간을 달아나다 얼굴을 마주치며 밑동만 남은 뿌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살점 그 살점도 물러지고 구멍 속으로 어둔 시간이 고인다 커다란 그물코 앞에서 갇힌 줄도 몰랐던 시간 거미줄처럼 촘촘히 눈을 뜬다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표정을 손에 쥐고 오랫동안 들다본다 2021년 봄호 1970년 충남 공주 출생.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내 이름은 파랗게 일렁이는 발목

내 이름은 파랗게 일렁이는 발목 김나영 지난여름 기습적 폭우가 한강 산책로를 짓밟고 지나갔다 낭창낭창한 꽃대를 자랑하던 꽃길이 곤죽이 되었다 구청 관리들이 그 자리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매복하고 있던 야생이 먼저 숟가락을 꽂았다 강아지풀, 돌피, 개밀, 가는털비름, 털빕새귀리가 '인디언 사회에는 잡초라는 말이 없다'는 전언 앞세우고 낡음 낡음한 멜빵바지에 손가락 삐딱하니 찔러 넣고서 동네 건달처럼 짝다리를 짚고서 건들건들 헝글헝글 그 행색이 하나같이 시시하고 껄렁껄렁해 보이지만 트릭이다, 저들은 야생당(野生黨)이 키우는 비밀병기다 봐라, 강아풀 외엔 암호 같지 않은가, 저 이름들 화가 폭발하면 아스팔트도 씹어 먹는 녹색 괴물들이다 조명발 한번 받아본 적 없지만 저 분야의 베테랑들이다 끝났다 싶을 때..

하지

하지 김나영 비릿한 밤꽃 냄새가 나를 덮쳤다 능소화 진홍빛 입술이 담장을 넘었다 화단의 으아리꽃들이 쩍쩍 벌어졌다 후텁지근한 흙내가 목덜미를 휘감고 올라왔다 벌과 나비의 날갯짓에 허공이 빨갛게 부풀었다 여자의 치맛단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추가 여물었다 이명처럼 끊겼다 이어지고 끊겼다 이어지는 개울물 소리 그 방에는 멀리서 온 마른 여자 하나와 눅눅한 베개 하나와 천천히 똬리를 풀기 시작하던 적요의 굶주린 혓바닥과 검은 근육질로 일렁이던 짐승 같은 밤의 숨소리와 누런 밤꽃 냄새가 탱탱하게 발기하던 그날 밤 밤의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온갖 것들의 붉은 하지와 시집 천년의 시작.2021,4 1961년 경북 영천 출생.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석사,박사 수료(문학박사) 1998년등단. 시집

묵호

묵호 신은숙 언덕과 바다가 내외처럼 낡아 가는 동네 언덕 꼭대기 집어등 닮은 쪽창들 간밤 수다를 토해 놓으면 아침 바다 윤슬이 노래로 다독인다 어깨가 내려앉은 논골담 고샅엔 수국이 한창이고 폐가 담쟁이는 마당을 지나 지붕까지 힘줄을 엮는다 살아 푸른 건 거기까지 나폴리도 여기선 다방을 차리고 극장은 종일 필름을 돌려도 '돌아온 원더 할매' 혼자서 웃고 있다 모퉁이 돌면 고래가 쏟아지고 허공이 따르는 막걸리에 목을 축인다 오징어는 담벼락에서 빨래처럼 말라 가고 묵호야 놀자 했더니 용팔아 이눔 쉐끼 어매 빗자루가 날아온다 페인트칠 벗겨진 벽화들마다 마음이 펄럭인다 묵묵히 기다림의 자세로 눈먼 저무는 등대에 기대 바다를 보면 떠난 애인은 다 묵호여서 눈 감아도 묵호만 보이고 그 이름 부르면 비릿한 멀미 다시는..

상사화

상사화 - 멀리 간 소녀에게 홍진기 따습한 손을 놓고 천리 먼 길 따로 앉아 생각다가 무느다가 끝내는 또 품는 이름 제대로 한 번 소리 내어 불러 볼란다, 목을 세워 술궂은 비 내리고 외진 언덕 바람 불어 누르고 다져 산 세월 그 아픔도 내가 챙겨 고독에 범벅이 된 채 울어 볼란다, 목을 놓고 시집2021,경남 경남 함안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현대문학 시, 시조문학 시조 등단 시집외8권, 조연현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시조시학상,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수상 한국현대시인협회, 국제펜경남지역회 고문.

연두

연두 박은형 주남지 왕버들이 연두를 시동 겁니다 넌짓한 마음을 단숨에 뜯어내는 승냥이 떼 같습니다 늦으면 늦은 대로 연두를 따라붙으려 두툼하게 녹이 난 슬픔이나 생애 첫 연서의 무용한 형식에 대해 고심합니다 일몰의 긴 회랑이라면 눈부신 졸음 폐역의 늦은 당신이라면 단팥죽 한 그릇 빈 식탁이라면 먼지를 보여 주는 흑백 한 문장 다발로 묶어 연두를 실어 갈 당나귀 어디 없을까요 당신과 나의 담장에도 뭉개질 만큼만 놓아기르기로 해요 연두가 그저 몇 걸음의 눈 배웅에 관여하는 거라면 나는 말할 수 없이 쓸쓸해서 꼭 살겠습니다 전승된다면 사랑 죽음이라면 끄덕끄덕 자장가까지 저수지 너른 고독에 찔려 신접의 병상처럼 에는 것 내 마음을 따라잡는 연두였다고 중얼거립니다 시집 2020.파란 경남 창원 출생. 2013년 ..

물 때

물 때 토지 문학제 시 당선작 신재희 느리게 다가오는 물의 걸음 물의 속도가 멈춘 자리 계곡의 바닥이 미끈거린다 거세게 흐르지 못하는 물길은 이 자리에서 얼마나 머뭇거렸을까 물의 엉덩이가 닿았던 자리마다 물 때가 끼었다 구불구불 휘돌아온 물소리를 먹고 자라는 돌들 줄어든 계곡물에 뒤척일 기력이 없어 안색이 누렇다 길쭉하거나 납작하거나 둥글거나 계곡의 슬하에서 뒹굴며 자란 물의 피붙이들 수면 아래 제 몸피만큼 걸쳐 입은 물 때는 정체된 속도에 주저앉은 습생의 뿌리들이다 물의 허리를 잡다 발목이 휘청거린다 물의 지느러미도 낮은 곳을 따라 구부러질 뿐 찌든 물 때는 쉬 벗겨지지 않는다 돌멩이 하나 집어 허물조차 껴안고 살던 숨결을 물에 씻는다 말간 얼굴을 드러내며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살아난다 계곡의..

달콤 중독

달콤 중독 강은진 나를 스쳐 지나며 당신은 작은 바람을 일으켜 내 속눈썹을 살짝 흔들었는데 어디선가 티라미수 냄새가 났어 그건 아마 당신의 작별 인사 너무 달콤해서 목이 아리던 그걸 우린 어째서 서로 떠먹여 주고 병든 시인들처럼 기침을 해댔던 걸까 당신이 떠나는 동안 나는 그 자리에서 계속 눈을 감고 뭉개진 케이크처럼 앉아 있었어 엉뚱한 기도문 같은 걸 외면서 티라미수엔 피처럼 끈적한 커피와 덜 익은 와인도 함께 들어 있다는 거 그땐 몰랐었잖아 모양 없는 것들에 이름을 붙여 주며 당신은 달다는 말을 위험하다는 말로 바꾸곤 했지만 단맛은 혀보다 마음으로 느끼는 거라서 먹을수록 나는 텅 비어 갔나 봐 그때의 케이크는 이미 먹어 버렸고 우리가 붙여 줬던 이름들도 이젠 지워지고 없으니까 이 바람이 사라질 때까지..

미루의 돼지

미루의 돼지 박정남 김용옥의 딸 미루*가 돼지우리에 들어 나체로 그 돼지들과 자그마치 104 시간을 껴안고 함께 보낸 것은 돼지는 원래 더러운 동물이 아니라는 것 우리 인간이 돼지를 농장에 가두어 키우다 보니 돼지는 원래 열이 높은 데다 스트레스까지 받다보니 진흙탕이나 배설물에 몸을 문대게 된 것이라는 것 돼지도 하루에 두세 번은 샤워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돼지의 입술은 은근한 분홍이다 미루가 아니더라도 한 번 껴안고 키스라도 해 보고 싶은 아기 돼지들이 또 여럿이다 열 번 백 번 돼지 입에 돈을 물리더라도 돼지는 모른다 끝까지 돈을 모른다 알고 보면 돼지는 깨끗한 동물이다 *김미루(1981년 生):예술가, 사진작가, 일러스터레이터, 예술 코디네이터. 2020 가을호 경북 구미 출생. 1973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