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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크 왕국

코르크 왕국 정연홍 차창 밖으로 코르크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 빨간 하초가 드러날 때까지 사람들이 껍질을 벗긴다 놀란 눈의 나무들 유리창 너머 나를 보고 있다 리스본의 골목길에 파두 가락이 뒹군다 길을 묻는 내게 소년이 이스쿠두를 보여 준다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이 한때 세계를 주름잡던 포르투갈의 후손들이라니 지금은 코르크 마개를 만들며 생을 보내고 있다니 붉게 짓이겨진 상처도 언젠간 다시 아문다 새살이 돋고 딱지도 떨어져 나가겠지만 기억이 아물 때쯤 사람들이 다시 낫을 들고 올 것이다 이베리아반도에 해가 지고 닻을 내린 선원들이 왁자지껄 골목으로 들어선다 낯선 거리에 서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인다 작은 창이 있는 카페에서 이국적인 여인을 만날 상상을 한다 뒷골목의 게스트하우스에 들어선다 내일은 비가..

회 류성훈 세상 바깥에서 내 장기를 보는 일과 네 생살 맛 중 어느 것이 나을까 계단에서 넘어진 생선이 국물을 쏟는다 나는 너의 머리가 매운탕으로 보여, 옛날이야기엔 먹을 것이 별로 없어 시간이 늙으면 그리 언성이 높은 걸까 칼이 참돔의 척수를 끊을 때 내가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된 때 방금 전까지 내 발을 피해 흔들던 그 꼬리의 동력은 어디로 갔는지 척수의 깊이를 그리도 잘 알던 너는, 척수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누가 자른 적 없는 꼬리를 언제 저 수채에 던져 버렸는지 너는 항상 먼저 구들을 밟고 올라서는데 길지도 있지도 않은 서로의 끝을 밟으려고만 하는 저 발 속에서 너는 물 밖 세상만 노래하는데 생살을 씹으면서, 생살,이라고 말하던 입술에서 따끔한 바다 맛이 난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계단은 있..

멀리서 빈다

멀리서 빈다 나태주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시집2015. 지혜 1945년 충남 서천 출생. 공주사범 졸업. 43년간 교직생활.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1973년 첫시집 외 35권 개인 시집 출간 등 산문집,시화집,선시집,동화집 약 100권 출간. 현재 한국시인협회 회장, 공주문화원장, 풀꽃문학관 관장

시집<향기로운 네 얼굴>

시집'향기로운 네 얼굴' 배종환 2020년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 되었다. 세종문학나눔 우수도서 발표 소식을 듣고 즐기는 혼술로 갑오징어와 참이슬 1병으로 즐겼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의 보잘것 없는 졸시가 내리 두 번 다 선정되 었다니 믿기지 않는 영광이다. 출판사별 2권을 넘지 못하는 선정 기준이 적용 된다는데 아무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감사드린다.

늦깎이

늦깎이 전영관 어디에 앉혀놔도 등신이었지만 시라는 거울 앞에 서면 척추가 휘어진다 초대장도 없이 잔치 구경 간 실업자같이 기웃거리는 습성을 대인 관계라 착각했다 사람을 넓혀야 한다고 욕심부리다가 기념사진의 병풍 노릇까지 해봤다 감기 걸렸다고 이불이나 탓하는 얼뜨기여서 타인의 재능을 노력으로 메우려 헛발질했다 비굴은 치욕을 성형한 생필품 재촉하는 이 없는데 결승선 같은 것 없는데 지각한다는느낌에 시달렸다 알았던 노래의 2절처럼 모임마다 가벼운 낯설음으로 채워졌다 웃더라도 타인들이 내 행복을 시기하지 못하도록 최초의 미소를 만들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웃음소리를 내보고 싶다 등신이라며 자책했다 또다른 등신들을 보는 눈이 생겨서 안도했다 타인의 불행을 과장해서 내 불행을 지우는 비법도 알게 되었다 거듭하다 보면..

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

약속된 꽃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묻는 말들 이원하 지금 여기는 물밖에 없어요 물이 몇 장으로 이루어져야 바다가 되는지 수분은 알까요 오늘따라 바다가 이름처럼 광야처럼 잔잔해요 잔잔해서 결이 없으니 바다가 몇 장인지 어떻게 셀까요 이와 비슷한 여러 어려운 일들을 어려운지 몰라주며 세다보면 순간순간이 별거 아닌 것처럼 세다보면 선배처럼 될 수 있어요? 지금 거긴 꽃밖에 없어요 책에서 읽었는데 수분의 기운만 있다면 바다를 건너 꽃밭에 갈 수 있대요 선배처럼 다른 소리지만 자다가 들었는데 파도가 잔잔해지면 가슴을 쓸다가 마음이 미끄러진대요 선배를 바라보다보니 밤낮이 바뀌네요 밤하늘 촘촘 박힌 별을 보고 있자니 버리자니 많이 그런 어둠이네요 이 어둠처럼 내일 낮을 살아갈 거예요 선배, 이렇게 말해본 적 있으시죠 ..

북아현동 스크린 #3

북아현동 스크린 #3 ─ 북아현동 산 1번 손정순 기억의 시간 가로지른 빗장에 대못을 꽝꽝 박으면 싸움 같은 흥정, 큰 고함소리 노을처럼 번지네 주인 떠난 빈 집마다 날품팔이 술주정꾼들 어슬렁거리고 미친바람들 웅웅대며 잃어버린 제 집 번지를 찾고 있네 하늘 아래 감금된 그녀, 잠시 세든 초여름 햇살에도 푸른 殺氣 느끼네 은빛 은어떼처럼 고와서 운명 거슬러 오르는 그대 유혹했다고,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다고, 빛과 어둠으로 가득 찬 묵은 페이지 넘기며 느리게, 아주 느리게 그대 바라보네 오래도록 영혼 이쪽저쪽 경계 들썩이다 한순간, 와르르 허물어지는 광경도 훔쳐보네 세상에서 가장 큰 욕심은 버리는 것이라는데 버리지도 떠나지도 못한 그녀, 棺 속에서 한 욕망 껴안고 있네 반딧불이 같은 외로움, 한 기다..

이별 장면

이별 장면 김민정 우리는 남자와 여자여서 함께 잠을 잤다 방은 하나 침대는 둘 양말은 셋 (여자는 손수건 대신 양말 한 짝으로 코를 풀었다지 아마) 잠은 홀수여서 한갓졌다 발이 시리니 잠이 안 왔다 깨어 있으려니 더 추웠다 호텔 체크아웃을 누가 할 것인가 숙박 요금이 3일 치나 쌓였으니 이쯤 되면 폭발적인 곁눈질이다 시집 문학동네 2016 1976년 인천 출생. 중앙대 문창과 동 대학원 졸업 199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박인환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수상

팬티와 국수나무

팬티와 국수나무 이승예 택시기사님이 멋진 아침 광명역에 간다 간밤에 목을 꾹꾹 눌러주던 식도염이 도져 아파오는데 왜 웃통을 벗고 감은 머리를 말리던 남자가 입고 있는 팬티가 뒤집혔지 깜박하는 일이 가슴을 뛰게 하지 팬티에는 관심 없어 잊지 말자고 올 때 뿌려둔 말들의 씨앗을 밟으며 돌아가는 길 이번엔 눈물이 아파서 목구멍이 빨갛게 만개했다 양력 오월 열 이틀 가파르게 채도를 높여가는 계절 혀끝에서 살던 엄마를 까맣게 죽이고 그 자리를 꿰찼는데 그녀가 그리워했던 쌀밥이 나무위에 하얗게 스는 오월 쌀밥나무 대신 나는 정원에 국수나무를 심었다 길게 살자고 나무속을 밀어내면 길게 떨어지는 국수의 사고방식 빈 국수나무속에 내 생각을 밀어 넣으면 내가 국수나무의 배부른 중심이 된다 혹시 재산관리나 부동산에 관심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