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 울라브 하우게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울라브 하우게 눈이 내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춤추며 내리는 눈송이에 서투른 창이라도 겨눌 것인가 아니면 어린 나무를 감싸 안고 내가 눈을 맞을 것인가 저녁 정원을 막대를 들고 다닌다 도우려고, 그저 막대로 두드려주거나 가지 끝을 당겨준다. ..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2.01
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 김선우 12월 마지막 날 B형 여자의 독백 ─ 13월에게 김선우 우리 종족의 피가 네 종류뿐이란 게 부끄러워요 더 많은 피의 비밀이 있을 텐데 고작 네 종류밖엔 감당하지 못하는 걸 테니까 네 종류 피는 질서 유지의 한도 네 종류 피 속에 숨어 있는 팔만 사천가지 비밀 얘기들이 궁금해 나는 전사가..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1.20
조용히 하라는 쉬 / 이담하 조용히 하라는 쉬 이담하 밝은 전구 아래서 오줌을 누다 보면 몸에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 입 밖에 없다면 귀가 가장 부끄럽다 쉬, 하는 소리는 몸의 부끄러움 전구가 나가면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그때 귀는 얼마나 환한 밝기가 될까 귀와 눈의 역할을 바꾸어 내 귀로 내 몸의 부끄러운..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1.20
능소화 / 박기섭 제 7회 발견문학상 수상작(서녘의, 책 외 5편) 능소화 박기섭 그리움 아니라면 그럴 리 없잖은가 한여름 뙤약볕에 혓바늘이 돋은 채로 수직의 전봇대 허리를 휘감을 리 없잖은가 이미 낙하마저 불가능한 높이에서 순간의 고압전류에 온몸을 대지를며 단 한 번 우레 속으로 뛰어내릴 리 없..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0.30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 / 김겨리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 김겨리 나무들이 발톱을 보일 때는 자신의 마지막 상처를 드러낼 때다 나무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발톱을 세우는데 그늘을 산란할 때 가장 예민해진다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은 그늘을 이소시키기 위해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 것 허공의 출구가 열리는 때를 기다려 ..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0.30
즐거운 편지 / 황동규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0.27
處暑 / 문태준 處 暑 문태준 얻어온 개가 울타리 아래 땅 그늘을 파댔다 짐승이 집에 맞지 않는다 싶어 낮에 다른 집에 주었다 볕에 널어두었던 고추를 걷고 양철로 덮었는데 밤이 되니 이슬이 졌다 방충망으로는 여치와 풀벌레가 딱 붙어서 문설주처럼 꿈적대지 않는다 가을이 오는가, 삽짝까지 심어..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0.27
장밋빛 새벽 / 이필 장밋빛 새벽 이필 선반 위 먼지가 아래위로 움직인다 원단에 부직포를 대고 바늘에 실을 꿰면 수십 개 촉이 동시에 돌아간다 점점 빨라져 바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하 공장은 금세 소음으로 가득 찬다 종이컵이 자판기에서 믹스 커피를 뽑아내는 동안 여자는 담배를 꺼내 문다 그녀가 ..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0.22
하쿠나마타타 / 오현정 하쿠나마타타* 오현정 남아프리카 여행 중 만난 현지인 가이드 지미 두 귀를 떼어내 머리에 붙이면 영락없이 하마 닮은 하지만 반갑다며 내미는 검은 손길 목화송이처럼 부드러웠다 여행 중 목이 아파 연달아 기침을 할 때마다 하쿠나마타타 낯선 물갈이 병으로 끙끙거릴 때에도 하쿠나..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9.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