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장밋빛 새벽 / 이필

폴래폴래 2019. 10. 22. 10:34




         장밋빛 새벽


                        이필



 선반 위 먼지가 아래위로 움직인다

 원단에 부직포를 대고 바늘에 실을 꿰면

 수십 개 촉이 동시에 돌아간다

 점점 빨라져 바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하 공장은 금세 소음으로 가득 찬다

 종이컵이 자판기에서 믹스 커피를 뽑아내는 동안

 여자는 담배를 꺼내 문다

 그녀가 야간작업을 지원한 이유는

 동료와 말을 섞지 않아도 되기 때문인데

 소문을 찍어내는 저 기계는 믿을 수가 없다

 무엇을 겨누지도 못하고 각도를 맞추지도 못하고

 언제 멈출지도 모른다

 바늘이 내리꽂히면서 장미 로고가 새겨진다

 고립은 빈틈없이 촘촘하다

 여자가 혼자 그 안의 기계를 돌리고 있다

 꽃잎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바늘이 그대로 엄지손톱을 뚫고 지난다

 뚝뚝 떨어져 내리는 붉은 잎

 실에 엉킨 통증을 어떻게 멈춰 세울지 모른다

 꽃다발을 안은 사람이 정문 앞을 지나간다

 별들이 지하 공장 유리창에 찬찬히 박히고 있다



 『모던포엠』2019년 5월호



 경북 영주 출생. 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2016년 문학사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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