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383

그녀의 서가

그녀의 서가(書架) 배한봉 세상에는 불타올라도 타지 않는 서가(書架)가 있다, 타오르면서도 풀잎 하나 태우지 않는 화염도 있다 나는 저 불꽃의 마음 읽으려고 그렁거리는 차를 몰고 7시간이나 달려왔다 층 층 만 권의 책을 쌓아올린 채석강 단애 한때는 사나운 짐승처럼 시퍼런 칼날 튀어나오던 삶이었겠다 그럼에도 벼랑에만 매달려 사는 가마우지새에게만은 둥지를 허락하는 여자였겠다 악다구니 쏟으면서, 그게 가난에게 내지르는 주먹질이란 걸 알았던 것일까 가파를수록 정 많고 눈물 많은 달동네 노을의 그 지독한 핏빛 아 나는 기껏 몇 권의 습작노트를 불태우고 한 세계를 잃은 듯 운 적이 있단 말인가 이제는 저렇게 불타올라도 용암처럼 들끓지 않는 그녀의 삶, 삶의 문장으로 채워진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가마우지새 되어 ..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박순원 진주 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 소리 고개 들어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서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못 본 듯이 지나더라 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사랑방이 소요터라 진주에 간다 진주성 촉석루 진주냉면 진주비빔밥 「토지」에서 대처였던 곳 박경리가 다녔던 진주여고 성선경은 마산에서 오고 조민은 다섯 시쯤 수업 끝나는 대로 술을 마시겠지 소주 맥주 회를 먹겠지 고기를 먹겠지 진주 진주 진주 같은 도시 남강 빨래 가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빨래하는데 난데없는 말굽 소리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간다 광주에서 두 시간 사백 리 길 고속버스터미널은 남강이 휘돌아 볼록 튀어..

마이크의 세계

2021년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수상 마이크의 세계 김유자 내가 아닌 너도 아닌 퍼져 가는 기분은 누구의 것인가 너의 목을 잡은 손바닥이 축축해진다 말이 내려앉은 귓속에서 엉겅퀴가 뻗어 간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 너의 목에 온통 엉겅퀴꽃이 필 때 너의 떨림을 이해하고 내 속의 네가 점점 더 커지고 구름이 빗줄기로 나뉘듯이 나를 갈라놓고 파편들은 벽에 부딪혀 돌아와 우리 위로 쏟아지지 사방이 거울인 방처럼 나와 너는 끝없이 서로를 관통하지 웅웅거리며 우리는 흩어진다 뭉쳐진다 사라진다 너로부터 흘러내린 나로부터 새 나가는 너와 나만 모르는 우리의 세계 수상시집 2008년 등단. 시집

휘어진 낮달과 낫과 푸른 산등성이

2021년 한국시인협회상 수상작 휘어진 낮달과 낫과 푸른 산등성이 권달웅 아득히 먼 산등성이에 낮달이 걸렸다 벗어놓은 지게에 낫이 꽂혔다 희미한 낮달도 닮은 낫도 등이 휘어졌다 푸른 산등성이도 아버지도 등이 휘어졌다 낫은 창백하고 낮달은 애달프다 아버지는 고프고 산등성이는 가파르다 모두 등이 휘어지도록 무거운 짐을 졌다 가도 가도 멀고 험준한 생의 비탈길 시집 1975년 등단. 시집 외

여름방학

제2회 계간 파란 신인상 당선작 여름방학 마윤지 너 매미가 언제 우는지 알아? 동트기 전부터 아침 먹을 때까지 우는 애가 참매미다 아침부터 낮까지 우는 매미는 말매미고 에스파뇰 공부를 한다고 했지 우리는 마당에 앉아서 따르르르 아르르르 한참 연습했다 보쏘뜨로-스 보쏘뜨라-스 너무 뜨거운 날엔 옥상에 물을 뿌렸다 크고 넓은 나뭇잎 일 층 대문 밖 골목 옆집 뒷집에까지 몰래 그렇게 했다 너넨 울면서 새도 쫓고 더도 잊는다고 하던데 아니야 매미는 떨면서 소리를 내는 거야 가득 찬 고무 대야 아주 느리게 헤엄치는 날개들 불이 너무 뜨거워 불 속에 손을 넣었다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했다 계간 파란 2022년 봄호 1993년 서울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스프링 시즌

스프링 시즌 윤성학 시간변경선을 지나 퇴근할 때면 응봉산 그늘 어두운 두무개길을 지날 때면 희생번트를 대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왜 매번 주자 1,2루에 타석에 들어서는지 매번 번트 사인이 나오는지 누군들 맘껏 휘두르고 싶지 않을까 누군들 더, 더 내달리고 싶지 않을까 세상은 늘 말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 그렇게 죽어도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는다 세상이 이토록 지루해진 이유를 알겠나 지루함이 세계를 운영하는 에너지임을 오늘도 번트를 대고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닌 보폭으로 돌아가는 길 누군가를 앞으로 보내기 위해 아웃된 8번 타자를 위해 응봉산 남쪽 비탈 3루 측 응원석 노란 옷을 맞춰 입은 개나리들이 파도 박수를 보내 주고 있었다 플레이 볼! 오늘, 시즌의 막이 올랐다 계간 파란 2022년..

적막하고 쓸쓸한 곳에 다녀왔다

적막하고 쓸쓸한 곳에 다녀왔다 신새벽 봄은 아직도 표류 중 3월, 폭설이 지운 길을 더듬어 질식한 푸른빛들을 따라 오른 허공 비탈 절름발이 새들의 발자국들이 어지러운 쯔데기골* 흰 바람벽에 그림자를 만들고 있던 고드름이 쭈뼛 귀를 세운다 고요를 깨우는 소란함 곳곳을 파헤치듯 들여다보는 여행자 무리에 쿨럭이는 빈 아궁이 영혼을 감아올리던 기도가 멈춘 곳 처마 밑엔 그늘만 웅크리고 있고 허기진 곰팡이들이 세력을 넓히고 있다 은둔자의 수행처는 영혼이 빠져나간 빈집, 빈집 낡아 덜컹거리는 창문 온기 달아난 찻잔만이 갈라진 벽 사이로 말을 걸어오고 내 입속은 축축한 단어들로 얼룩지고 있다 멈춰진 시간의 저쪽을 덜컹거리며 내린 곳 낡은 공간을 더듬거리다 눈시울만 훔치고 돌아선다 * 법정 스님이 머물던 곳. 시집 미..

럭키슈퍼

조선일보 2020년 신춘문예 당선작 럭키슈퍼 고선경 농담은 껍질째 먹는 과일입니다 전봇대 아래 버려진 홍시를 까마귀가 쪼아 먹네요 나는 럭키슈퍼 평상에 앉아 풍선껌 씹으면서 나뭇가지에 맺힌 열매를 세어 보는데요 원래 낙과가 맛있습니다 사과 한 알에도 세계가 있겠지요 풍선껌을 세계만큼 크게 불어 봅니다 그러다 터지면 서둘러 입속에 훔쳐 넣습니다 세계의 단물이 거의 다 빠졌어요 슈퍼 사장님 딸은 중학교 동창이고 서울에서 대기업에 다닙니다 대기업 맛은 저도 좀 아는데요 우리 집도 그 회사가 만든 감미료를 씁니다 대기업은 농담 맛을 좀 압니까? 농담은 슈퍼에서도 팔지 않습니다 여름이 다시 오면 자두를 먹고 자두 씨를 심을 거예요 나는 껍질째 삼키는 게 좋거든요 그래도 다 소화되거든요 미래는 헐렁한 양말처럼 자주..

엽록체에 대한 기억

202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엽록체에 대한 기억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

어느 우수주의자의 하루

어느 우수憂愁주의자의 하루 이영춘 그가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다 그의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이 지나가는지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저장하는지 새 소리 물소리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듣고 있나 보다 가끔 뭔가 생각하면서 희죽- 웃는 걸 보면 나는 그의 등 뒤에서 그의 가슴 한쪽을 긋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 듣는다 어느 궤도에서인가 잘려 나온 푸른 이파리 같은 그의 목덜미 목덜미는 가끔 죽음으로 가는 붉은 신호등 앞에 망연히 서서 혹은 의자에 앉아서 귀에는 리시버를 꽂고 혼자서 엷은 창호지 같이 웃기도 하면서 죽음의 집을 짓고 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철학적인 말을 믿으면서 그는 그 완성을 어떻게 건너갈까, 가서 닿을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의자는 하루 종일 무거워져서 쳐들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