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라디오 / 이이체 나무 라디오 / 이이체 잎사귀들이 살고 있는 스피커, 한쪽의 귀가 없다. 나이테가 생기는 책상에 당신은 앉아 있다 주파수를 돌리자 잎사귀들이 떨어지고 허공은 종이를 찢어 한쪽 소리를 날려보낸다 나무로 된 음악은 숲을 기억한다. 모든 음악은 기억이 부르는 것 당신은 그것을 씨앗들에게 달아준..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24
모과처럼 / 윤여홍 모과처럼 / 윤여홍 햇살도 건성으로 받아야 윤기가 난다 얼룩까지 지워지면 우리의 본색은 없는 것 서늘하게 달궈야 잘 익는 법 모과 그늘이 모과를 닮아 가고 있다 푸른 물감이 자욱하다 시고 떫은 잔광이 무게를 만들고 있다 모과가 땅으로 내리는 과단성을 40년 가까이 뜨락에서 지켜봤다 낡은 중절..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24
대추나무와 사귀다 / 김명인 대추나무와 사귀다 / 김명인 어떤 벌레가 어머니의 회로를 갉아먹었는지 깜박깜박 기억이 헛발을 디딜 때가 잦다 어머니는 지금 망각이라는 골목에 접어드신 것이니 반지수를 이어놓아도 엉뚱한 곳에서 살다 오신 듯 한생이 뒤죽박죽이다 생사의 길 예 있어도 분간할 수 없으니 문득 얕은 꿈에서 깨..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22
공기는 내 사랑 / 정진규 공기는 내 사랑 / 정진규 감자 껍질을 벗겨봐 특히 자주감자 껍질을 벗겨봐 감자의 살이 금방 보랏빛으로 멍드는 걸 보신 적 있지 속살에 공기가 닿으면 무슨 화학 변화가 아니라 공기의 속살이 보랏빛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되실 거야 감자가 온몸으로 가르쳐주지 공기는 늘 온 몸이 멍들어 있다는 걸 ..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22
거짓말로 참말하기 / 유안진 거짓말로 참말하기 / 유안진 지금은 없어진 공산주의 시대였다 루마니아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공부였단다 여러분의 아버지는 누구죠?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요 여러분의 어머니는 누구죠? 엘레나 차우세스쿠요 잘 대답했어요. 여러분은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어요? 고아(孤兒)요 (한..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21
절 1 / 이영광 절 1 / 이영광 늙은 몸은 절하기 위해 절에 온다 절 가지고 될 일도 안 될 일도 있고 절 없이도 일은 되기도 안 되기도 하는 것인데, 그저 모든 걸 다 들어 바치는 절은 내가 받는 듯, 난감하다 온몸으로 사지를 구부리고 두 손으로 그 힘을 받쳐 올렸다가 다시 통째로 제자리에 내려놓은 절 성한 데 없는 ..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19
셀프 포트레이트 / 곽은영 셀프 포트레이트 / 곽은영 이제 나는 더 이상 바람의 아이를 낳기 위해 기다리지 않아요 우산을 들고 지붕에 앉아 백묵으로 날짜를 긋지 않아요 엄마, 난 바람이 좋아 바람이 너의 머리칼을 빗겨줘서 그렇단다, 기다리렴 그러나 엄마, 엄마가 죽은 날 알아버렸어요 내가 바람이라는 사실을 이게 무슨 ..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19
돈 / 윤모촌 돈 윤모촌 2차대전 후 강대국의 예속에서 독립한 나라들은, 후진국이란 꼬리표에다 으레 연상케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 걸핏하면 벌이는 쿠데타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정변에서 쫓겨나고 쫓아내고 하는 것을 보면, 마치 치기어린 아이들이 벌이는 놀음판이다. 권좌에 앉는 구실이 민생(民生)을 위.. 文學의 오솔길/수필방 2008.10.18
사기꾼 이야기 / 정성수 사기꾼 이야기 / 정성수 한평생 나는 사기를 쳤네 언제나 추운 앞마당 내다보며 보아라, 눈부신 봄날이 저어기 오고 있지 않느냐고 눈이 큰 아내에게 딸에게 아들에게 슬픈 표정도 없이 사기를 쳤네 식구들은 늘 처음인 것처럼 깨끗한 손 들어 답례를 보내고 먼지 낀 형광등 아래 잠을 청했지 다음날 ..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17
저기 저 붉은 꽃잎 / 이영선 저기 저 붉은 꽃잎 / 이영선 지난 봄 옻칠한 식탁 앞에는 네 개의 의자들이 묵언수행 중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너른 식탁 등 뒤에 두고 개수대 앞에 서서 밥을 먹기 시작한 것이 찬도 별반 없이 우적우적 씹는 이것이 밥인지 쓸쓸함인지 영치금 같은 밥덩이를 삼키며 얼마나 자주 목이 메었는지 북쪽머리..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