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층계 / 장석남 돌층계 장석남 저무는 돌 층계를 위에서 바스듬히 내려다보면 저 아래는 결코 흙마당이건만 철썩이는 붉은 꽃바다가 있는 것만 같아요 멀찍이 이만큼 서서 바라보니 다행이지 무슨 멀미나는 운명들이 생겨나듯 풀잎들 노을을 이고 마당가를 철썩여요 막돌들을 업어다가 안아다가 놓고, 놓고, 놓고 또..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1.30
숙소에서 만나요 / 최문자 숙소에서 만나요 최문자 가려워서 장작은 쪼개지다 말고 불 속으로 들어간다 가려워서 양파는 제 몸을 까발리러 손가락 안으로 들어간다 가려워서 고향은 가려움이 그치는 숙소 가려움이 한 끝으로 몰아갈 때 그치는 그 다른 한끝 따스한 팔꿈치 새하얀 붕대를 끝까지 풀어내고 환부가 바람을 쏘이는..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1.28
꽃은 자전거를 타고 / 최문자 사진출처:네이버포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최문자 그녀가 죽던 날 꽃은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녀의 남자가 입원실 현관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막 아네모네 꽃을 내리려고 할 때 그녀의 심장은 뚝 멎었다 꽃은 다시 자전거를 타고 영안실 근처로 갔다 죽을 자리에서도 타오른다는 아네모네가 놀란 자전..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1.28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 오탁번 순은(純銀)이 빛나는 이 아침에 오탁번 눈을 밟으면 귀가 맑게 트인다. 나뭇가지마다 순은의 손끝으로 빛나는 눈 내린 숲길에 멈추어 선 겨울 아침의 행인들. 원시림이 매몰될 때 땅이 꺼지는 소리, 천 년 동안 땅에 묻혀 딴딴한 석탄으로 변모하는 소리, 캄캄한 시간 바깥에 숨어 있다가 발굴되어 건강..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1.26
여게가 도솔천인가 / 문성해 선운사 도솔천 . 사진:네이버포토 제1회 수주문학상 대상 여게가 도솔천인가 문채인(문성해) 칠성시장 한켠 죽은 개들의 나라로 들어선다 누렁개,흰 개 할 것 없이 검게 그슬린 채 순대처럼 중첩되어 누워 있는 곳 다 부질없어라. 살아서 쏘다녔던 거리와 이빨을 드러내던 증오 쓰레기통 뒤지던 욕망들..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1.25
정동진역 / 김영남 정동진역 김영남 겨울이 다른 곳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닷가 그 마을에 가면 정동진이라는 억새꽃 같은 간이역이 있다. 계절마다 쓸쓸한 꽃들과 벤치를 내려놓고 가끔 두 칸 열차 가득 조개껍질이 되어버린 몸들을 싣고 떠나는 역, 여기에는 혼자 뒹굴기에 좋은 모래사장이 있고, 해안선을 잡아놓고 끓..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1.22
함승현 옷 수선집 / 이사라 사진출처:네이버포토 함승현 옷 수선집 이사라 동네에는 항상 뒷길이 있다 뒷길에는 햇빛도 비스듬히 내려와 앉는다 낡아서 보풀이 일어나는 옷처럼 흑백의 그림자로 앉아 있는 사람 바닥에 뒤엉켜 무늬가 된 실밥들이 그 사람의 생이다 달콤한 것들은 늘 배경으로 물러서 있고 뽀얀 국물 한 그릇이 ..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1.21
안개의 行步 / 반숙자 사진제공: 네이버포토 < 2006년 대표 문제수필> 안개의 行步 반숙자 사람의 숲 사람들 숲을 빠져나왔다. 오늘 플라자 뷔페에서 밝은 사회 클럽 회장 이취임식이 있었다. 다른 모임과는 달리 이 모임은 종소리로 시작해서 종소리로 끝나는 특이한 회의 순서에다가 명상시간이 있어서 잠시지만 눈을 .. 文學의 오솔길/수필방 2008.11.18
오동나무 연상(硯床) / 윤오영 오동나무 연상硯床 윤오영 전에 선비 방에서 본 오동나무 연상. 나는 오늘 C노부인을 만나보고 왜 갑자기 이 연상이 떠으르는 것일까. "한국의 여성은 서구의 여성에 비해 젊음을 오래 지니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서구의 여성에 비교해본 일은 없지만, 한국 여성들의 젊은 모습이 너무 짧다.. 文學의 오솔길/수필방 2008.11.16
술 / 유영금 사진출처:네이버포토 술 유영금 도발적인 년 사내들이 꼼짝없이 감전되고 말아 목젖을 애무할 때 아찔한 쾌감 짜릿짜릿 고조되거든 그 맛에 흐믈흐믈 녹아 낙주가는 쓸개를, 관주가는 췌장을 폐주가는 간을 바쳐 사랑하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애첩인 거야 발칙한 년 이름도 향기도 수만가지 성.. 文學의 오솔길/시창고 2008.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