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히말라야 가라사대 / 김혜순

폴래폴래 2010. 6. 16. 09:28

 

 

  사진: 김남희 여행가

 

 

 

  히말라야 가라사대

 

                                - 김혜순  

 

 

 

 보아라 심해어들이다

 저들은 일평생 발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저들에게 태어난다는 것은 깊이 빠지는 것이다

 바닥까지 일평생 떨어져가는 것이다

 

 보아라 심해어들이다

 판화 속에 새겨진 것처럼 바닥에 들러붙은 저 몸들을 보아라

 저들은 어둡다 몸에서 빛 한 방울 새어 나오지 않는다

 외로움으로 뭉쳐진 저 어둔 덩어리들을 보아라

 수압이 끔찍한가 보다

 배낭을 지고 올라오는 저 여자

 헐떡거리는 입술이 다물어질 줄 모른다

 

 보아라 나는 저 심해에서 반지를 잃었다

 유성이 떨어져 심해를 친다

 깊고 깊은 물속에 내 눈발들은 닿지도 못한다

 수면 위에 떠오른 내 마음이 파닥거린다

 한번 흘러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저들은 말한다

 

 보아라 수평선 아래 저 멀리

 배낭을 메고 여자가 올라온다

 붉은 노을이 그림을 그리는 여자의 흰 바지

 피의 파도가 그녀의 안팎에서 철썩댄다

 심해어들은 죽어서야 발이 땅에서 떨어진다

 

 

 

 

  시집『당신의 첫』문지 2008

 

 

 

 

 시인의 뒤표지 글

 

 

 머나먼 은하계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엔 들리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돌고 돌다가

 내 가슴에 안경알 고정시키는 나사못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붙박여올 때

 

 저기 저 남태평양쯤에서

 몰려다니던 미친 태풍이

 구름을 몰고 천둥 벼락 치며 휘몰려 다니다가

 내 발끝에서부터

 내 새끼손가락의 보일 듯 말 듯한 지문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북상해올 때

 

 그때 나, 창문 위로 피어오르는 성에꽃 같은 말들

 삼켜버려야 할 때

 

 지구 한 덩이가 파문을 그리며

 바닥없는 깊이로 떨어져갈 때

 그 파문의 주름 하나하나에 맺혀 터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꽃들

 세상 처음 깨어나 우짖는 새들, 첫 걸음마 떼는 아가들

 

 그리고 몸속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파문들

 이 검은 연못 밖으로 쏟아지고 싶어

 내 몸에서 잉크병 속의 잉크처럼 앙탈하며

 흐느끼는 수백 개의 동심원들

 몸 밖에서 나더러 나오라고 어서 나와보라고

 부르르 부르르 온몸을 떠는 연못가의 나뭇가지들

 

 저 멀리 대륙 한가운데 사막들마다

 바다를 부르는 소라고둥 화석들의 애처롭게 타는 목소리 들릴 때

 그 소리 듣느라 일평생 한시도 잠 못 자고

 화답하는 세상의 모든 파도들 왔다가 다시 밀릴 때

 

 그때 나,

 

 

 

 

   1955년 경북 울진 출생. 건국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79년『문학과지성』등단.

   시집<또 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불쌍한 사랑 기계>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한 잔의 붉은 거울> 등

   김수영문학상, 현대시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수상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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