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축문(祝文) / 김은주

폴래폴래 2010. 6. 16. 12:47

 

 

 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축문(祝文)

 

                           - 김은주  

 

 

 

 단기와 서기의 월일은 고할 수 없사옵니다

 하여 새의 깃털을 뽑아 붓으로 쓰나이다

 한 번도 그림자를 들키지 않은 종(種)이옵니다

 네 발 달린 짐승은 위장 속에 씨앗을 숨겨 달아나고

 도닥도닥 얼러도 생육(生育)을 배반하니

 두 발 달린 가금(家禽)의 피를 고아 쓰나이다

 눈알을 굴리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긴 하오나

 역병이 돌아 살이 짓물러 곤죽이 되어도

 털갈이를 하지 않는 계통(系統)이옵니다

 껍질이 싸고 있는 속엣 것이 단단할 리 만무하니

 껍데기는 버리고 테를 동인 널빤지에 쓰겠나이다

 올해 처음 목과(木果)를 낳은 어미나무이옵니다

 까닭 없이 우물에 빠진 달을 건지려고 허공에 손을 찔러 넣고

 바람을 섞고 또 섞는 습성을 가졌사옵니다

 이리 쓴 것을 문설주 앞 돌멩이로 눌러 놓사옵니다

 소리를 먹고 자라 일생 이명(耳鳴)에 시달리는 돌이옵니다

 이따금 웅 웅 웅 속엣 말로 떨리다가는 말 것이니

 어여삐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물기를 버린 달의 밤

 맑은 술과 별을 함께 구워 올리니 삼가 흠향(歆饗) 하시옵고

 촛농으로 없는 입을 봉하시매

 기꺼이 무덤의 시간으로 드시옵소서

 

 

 

 

  『시와사상』2010년 여름호

 

 

 

 

 

  - 1980년 서울 출생. 한양여대 문창과 졸업

     2009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