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축문(祝文)
- 김은주
단기와 서기의 월일은 고할 수 없사옵니다
하여 새의 깃털을 뽑아 붓으로 쓰나이다
한 번도 그림자를 들키지 않은 종(種)이옵니다
네 발 달린 짐승은 위장 속에 씨앗을 숨겨 달아나고
도닥도닥 얼러도 생육(生育)을 배반하니
두 발 달린 가금(家禽)의 피를 고아 쓰나이다
눈알을 굴리지 못하는 병을 가지고 있긴 하오나
역병이 돌아 살이 짓물러 곤죽이 되어도
털갈이를 하지 않는 계통(系統)이옵니다
껍질이 싸고 있는 속엣 것이 단단할 리 만무하니
껍데기는 버리고 테를 동인 널빤지에 쓰겠나이다
올해 처음 목과(木果)를 낳은 어미나무이옵니다
까닭 없이 우물에 빠진 달을 건지려고 허공에 손을 찔러 넣고
바람을 섞고 또 섞는 습성을 가졌사옵니다
이리 쓴 것을 문설주 앞 돌멩이로 눌러 놓사옵니다
소리를 먹고 자라 일생 이명(耳鳴)에 시달리는 돌이옵니다
이따금 웅 웅 웅 속엣 말로 떨리다가는 말 것이니
어여삐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물기를 버린 달의 밤
맑은 술과 별을 함께 구워 올리니 삼가 흠향(歆饗) 하시옵고
촛농으로 없는 입을 봉하시매
기꺼이 무덤의 시간으로 드시옵소서
『시와사상』2010년 여름호
- 1980년 서울 출생. 한양여대 문창과 졸업
2009년『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詩心의 향기 > 시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가리노래방을 지날 때 / 김민정 (0) | 2010.06.17 |
---|---|
괄호와 괄호 사이 / 성은주 (0) | 2010.06.17 |
히말라야 가라사대 / 김혜순 (0) | 2010.06.16 |
바람이 불어오는 길 / 이승하 (0) | 2010.06.15 |
다시 길 떠나는 그대 / 이승하 (0) | 2010.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