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오솔길/시창고

탁족도(濯足圖)

폴래폴래 2009. 4. 20. 15:48

 

 

 

 

 

 

 

        탁족도(濯足圖)    안도현 

 

 

  전주 누옥에서 백담사 만해마을까지 과속을 일삼아 달려왔으니 무릇 짐승의 그것처럼 뜨거워졌겠다 싶은 두 발을 계곡물 속으로 밀어넣는다

 

  잠깐 김밥과 물을 찾아 휴게소 상인들의 점포 앞으로 누추하게 벌벌거리며 걸음을 뗀 적 있으나 그래도 오줌을 눌 때는 제깐에 제법 사이좋게 떨어져 있던 두 발이다

 

  내 발바닥에 달라붙어 딱딱하게 굳고 뜨거워진 길이여, 불 꺼지는 소리를 내며 식으라, 나는 내심 고사(高士)인 양 물의 속살에 발을 의탁하였다

 

  허나, 빈한한 하체와 허리띠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아랫배의 과적이 적이 민망하여 애써 한참을 생각느니, 길을 달려왔으나 정작 길을 데리고 오지는 못하였다는 자책이 물소리가 되어 발목을 묶는다

 

  일찍이 들으니 연암 같은 이는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도 물소리가 귀에 닿지 않았다는데, 내 귓속에는 일생을 헛짚고 살아온 물소리가 몇 두레박이다 헛짚어도 길을 여는 저 물줄기를 장하게 생각할지언정 무심하게 흘려보낼 수 없다

 

  그러다가 또 내 두 발은 비유컨대 물속의 교각이라는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나는 물속에 발을 담그고 두 개의 허공을 뚫고 말았던 것, 내 몸이 앉아 있는 허공이었던 것, 필경에는 아무도 건너갈 수 없어 스스로 건너가야만 하는 허공 같은 다리였던 것

 

  어쩔거나, 물에 뜬 구름들 불러모아 비빔밥을 만들어 저자의 중생들에게 한 양푼씩 먹일까, 수면에 욜랑욜랑 무늬를 짓는 빛의 시문(詩文)을 베껴두었다가 밤 들면 어두운 창가에 걸어나 볼까, 이 계곡에 산다는 어름치의 집을 방문해 그 새끼들에게 공책값이라도 쥐여줄까, 이렇게 몇자 적어도 과하지 않을지

 

 

 

 

 

 

 

                     - 1961년 경북 예천 출생. 원광대 국문과 단국대 대학원 문창과 졸업.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우석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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