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미 시보기
가시연
태풍이 지나가고 가시연은 제 어미의 몸인 커다란 잎의
살을 뚫고 물속에서 솟아오른다
핵처럼 단단한 성게같은 가시봉오리를 쩍 가르고
흑자줏빛 혓바닥을 천천히 내민다
저 끔직한 식물성을,
꽃이 아니라고 말하기엔 너무나 꽃인 듯한
가시연의
가시를 다 뽑아버리고 그 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나는
오래 방죽을 서성거린다
붉은 잎맥으로 흐르는 짐승의 피를 다 받아 마시고 나서야 꽃은
비명처럼 피어난다
못 가장자리의 방죽이 서서히 허물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금이 가고 있는 소리를
저 혼자 듣고 있는
가시연의 흑자줏빛 혓바닥들
옛집
나와 동생이 탯줄을 잘랐다는 이십 년도 넘게 내버려진 폐가에
아침 안개를 걷고 올라가 보면
잡풀과 도꼬마리 옷에 쩍쩍 들러붙어
마당 어귀에서부터 발목이 잡힌다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 어떤 힘도 완강하게 거부하는
폐허의 城, 깨진 옹기뒹구는 장독대를 바라보며 폐허와 내가
반대편에서 자라고 있었음을 알겠다
메주를 메달아 놓아 늘 쾨쾨한 냄새가 가시지 않던
사랑방 문짝까지 닿으려면
허리까지 오는 잡풀들만 걷어내면 되는 것일까
길을 낼 한치의 빈틈도 내주지 않는 잡풀과 나 사이의 경계가
산맥처럼 멀다 폐허를 더듬으려면
내 몸 구석구석을 만져보면 된다
동생이 구운 참새 다리를 물고 서 있다 작은아버지가 타작을 한다
할머니가 애호박을 삶는다 고모는 보이지 않는다
장독대 옆에 참나리가 핀다 뒤란에 까마중이 까맣게 익는다
내가 그걸 탁탁 터뜨린다 옛집이 잠시 붐빈다
죽어 한가로운 앞마당의 감나무,
이사터 옛집과 내가 헤어지고 나면 서로 어디까지 치 닫을지 모른다
옛집은 낙타의 걸음걸이로 세월을 향한다
장대비
오래된 쇠못의 붉은 옷이 얼룩진다
시든 꽃대의 목덜미에 생채기를 내며
긴 손톱이 지나가는 자국
아픈 몸마다 팅팅 내리꽂히는
녹슨 쇠못들
떨어지는 소리
하얀 마당에 푹 푹 단내를 내며
쏟아지는 녹물들
붉은 빗금을 그으며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닭벼슬! 맨드라미! 백일홍! 해당화! 엉겅퀴! 큰바늘꽃붉은잎!
신음소리를 내며 막 벌어지는
상처의 입들,
눈동자를 붉게 물들이며
나쁜 피를 다 쏟아내는 저녁
-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1990년 '한길문학'등단
제16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시집<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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