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나가다 / 이문재 사랑이 나가다 이문재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의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20
봄의 줄탁 / 도종환 봄의 줄탁 도종환 모과나무 꽃순이 나무껍질을 열고 나오려고 속에서 입술을 옴찔옴찔 거리는 걸 바라보다 봄이 따뜻한 부리로 톡톡 쪼며 지나간다 봄의 줄탁 금이 간 봉오리마다 좁쌀알 만한 몸을 내미는 꽃들 앵두나무 자두나무 산벚나무 꽃들 몸을 비틀며 알에서 깨어나오는 걸 바라본다 내일은 ..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20
민들레 / 신용목 민들레 신용목 가장 높은 곳에 보푸라기 깃을 단다 오직 사랑은 내 몸을 비워 그대에게 날아가는 일 외로운 정수리에 날개를 단다 먼지도 솜털도 아니게 그것이 아니면 흩어져버리려고 그것이 아니면 부서져버리려고 누군가 나를 참수한다 해도 모가지를 가져가지는 못할 것이다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17
허물 / 정호승 허물 정호승 느티나무 둥치에 매미 허물이 붙어 있다 바람이 불어도 꼼짝도 하지 않고 착 달라붙어 있다 나는 허물을 떼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순간 죽어 있는 줄 알았던 허물이 갑자기 몸에 힘을 주었다 내가 힘을 주면 줄수록 허물의 발이 느티나무에 더 착 달라붙었다 허물은 허물을 벗고 날아간 어..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16
시스티나 / 고은 시스티나 고은 자네 꼽추가 되도록 사랑해봤나? 꼽추가 되도록 타락해봤나? 나는 틀렸어 어린 시절 생각나 생복숭아 비바람에 다 떨어진 날 새끼 열여섯 낳아 열하나 잃고 다섯 남은 여든 살 할멈 열두번째 딸 죽은 날 꼽추할멈 울던 날 생각나 천정화 4년 꼽추가 되어버린 늙은 미켈란젤로 그 사람도 ..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16
검은 방 / 박장호 검은 방 박장호 어제는 웃고 있었다. 술에 많이 취했고 슬레이트 지붕에 비가 내리치고 있었고 음악도 듣고 있었다. 나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며 웃고 있었다. 어제는 웃고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말들을 했고 기억나는 말을 들었다. 오늘은 행복해 보이네요. 창백한 그림자가 방 안에 드리워지고 있을 ..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16
지저귀던 저 새는 지저귀던 저 새는 심재휘 가끔씩 내 귓속으로 돌아와 둥지를 트는 새 한 마리가 있다 귀를 빌려준 적이 없는데 제 것인 양 깃들어 울고 간다 열흘쯤을 살다가 떠난 자리에는 울음의 재들이 수북하기도 해 사나운 후회들 가져가라고 나는 먼 숲에 귀를 대고 한나절 재를 뿌리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열흘..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15
어머니3 어머니3 오탁번 봄 햇살 아기손처럼 고물고물 물레, 낮달맞이, 술패랭이, 현호색 간질이며 연노랑 분홍빛 보랏빛 웃음을 터뜨리는 곳 차를 몰고 온 석탄빛 손들이 놀라 길 옆 오이넝쿨 아래로 숨는 곳 나는 방금 돌 지난 앉은 뱅이꽃이에요 나는 그저께 이사 온 우산꽃이에요 에헴, 나는 60년 전 애련분..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15
똥볼 똥볼 오탁번 축구시합하러 운동장으로 나갈 때 내가 코딱지를 파 먹으면서 개미 똥구녁 맛 같다고 하니까 주근깨가 다닥다닥한 여자 부반장 복실이가 멥쌀눈을 흘겼다 나는 동해물팀 공격수 등번호 9번 달고 냅다 달렸다 찬스를 잡아 슛을 했는데 아뿔사! 똥볼이 됐다 복실이가 메롱메롱 놀렸다 날아..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15
굴비 굴비 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 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 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 둘러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러 간 사내의 .. 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