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고향에 빠지다 / 박형준

폴래폴래 2011. 10. 30. 10:19

 

 

사진:네이버포토

 

 

 

 

 고향에 빠지다

 

                                 - 박형준

 

 

 

 배롱나무 잎잎마다 귀신과 도깨비가 그득했다

 고향에 내려갔다가

 고향에 빠졌다

 

 나는 배롱나무 꽃분홍에 여름 하늘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어둑어둑해져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대문을 밀기도 전에

 ‘어매’ 하고 외쳐 불렀던 까까머리 시절을 보았다

 

 나는 구덩이에 빠져

 죽음의 문전에서 어매를 다시 불러본다

 금세 방 안에 30촉 전등이 켜지고

 어둠 속에서

 어매의 신발 끄는 소리……

 신발 끄는 소리……

 

 고향에서 팔이 부러져 돌아왔다

 사람들이 공터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다

 뉴타운 공사로 마지막 남은 교회가 철거되고 있다

 

 종탑 기둥 네 곳을 포클레인이 칠 때마다

 교회 전체가 흔들린다

 신은 흔들림 속에서만 우리에게 오듯이

 일순간 종탑에서 요란스레 종소리가 울리고

 공터의 구덩이 속으로 꼬꾸라진다

 

 비탈에 대문이 덩그라니 있지만

 계단만 남아 있는 집들,

 부지런 팔목의 뼛속에서

 배롱나무 꽃분홍이 울컥, 피어난다

 

 

 

 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지 2011년

 

 

 

 

 -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빵냄새를 풍기는 거울>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있다><춤>

   동서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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