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포토
스윙
- 여태천
커피 물이 끓는 동안에 홈런은 나온다.
그는 왼발을 크게 내디디며 배트를 휘둘렀다.
좌익수 키를 훌쩍 넘어가는 마음.
제기랄, 뭐하자는 거야.
마음을 읽힌 자들이 이 말을 즐겨 쓴다고
이유 없이 생각한다.
살아남은자의 고집 같은,
커피 물이 다시 끓는 동안의 시간.
식탁 위에 놓인 찻잔을 잠시 잊고 돌아오는 시간.
오후 2시 26분 37초,
몸이고 마음이고 새까맣다.
20년 넘게 믿어 온 기정사실.
내 오후의 어디쯤에는 불이 났고 구멍이 뚫렸던 것이다.
방금 전 먹었던 너그러운 마음을
다시 붙들어 매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7초.
애가 타고 꿈은 그렇게 식는다.
오후 2시 26분 54초,
커피 물이 다시 끓지 않는 시간.
식탁 위로 찻잔을 찾으러 오는 시간.
커피는 아주 조금 식었고
향이 깊어지는
바로 그때
도무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
국자를 들고 우아하게 스윙을 한다.
플라이아웃
이번에도 중견수는 머리 위로 날아오르는 볼을 놓쳤다.
조명 탑의 불빛 속으로 사라진 볼.
빤히 눈 뜨고도 모르는 사실들.
판단에도 경계라는 게 있어
봐서는 알 수 없는 사실의 자리가 있다.
플라이 볼의 실재는
볼에 있는 걸까, 플라이에 있는 걸까.
비어 있는 궁리(窮理)에 있는 걸까.
플라이 볼이 흔적만 남기고 간 허공.
모양이라고도 할 수 없게
물방울들이 모여 있다.
커피 잔 위의 방울들
유난히 골똘하다.
물일까 아닐까.
안과 밖 어디도 아닌 곳에서 동글동글 굴러다니는,
어떤 날은 몸도 마음도 공중에 있다.
공중을 선회하는 비행기는
날아가는 중일까, 가라앉는 중일까.
갑자기 다리가 사라진 듯 가볍다.
비둘깃과에 속하는 새 한 마리가 긋고 지나가는 하늘.
조류의 마지막에 대해
할 말이 많지 않다.
적당한 높이에 마음을 걸어 두면
어두워서 뚜렷해지는 생각들.
모두 플라이아웃이다.
시집『스윙』민음사2008.
-1971년 경남 하동 출생. 고대 국문과 同 대학원 박사.
2000년《문학사상》등단. 김수영문학상 수상.(2008)
시집<국외자들>.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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