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점 찍다
- 홍신선
사창굴이 따로 있는가 아파트 단지 뒷길 화단에
때 늦은 쪽방만 한 매화들 몸 활짝 열었다
무슨 내통이라도 하는지 앵벌이 한 마리 절뚝절뚝 한쪽 발 끌며
꽃에서 꽃으로 방에서 방으로 점, 점, 점 찍듯 들렀다 날아간다
날아가다 또 들른다
무저갱 같은 꽃들의 보지 속에서
반출 금지된 자손이라도 비사입하는가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 떠도는 널빤지 구멍 속으로
모가지 한 번 내미는 것이
목숨 점지되는 인연이라는데*
쪽방촌 성폭행범처럼 점점점 씨를 묻으며 드나드는 저 앵벌이 선택은
인연인가 우연인가
매화들 뭇 가지에서 가건물처럼 철거된 빈 꽃자리
곧 거북이 모가지만 한 열매들 불쑥불쑥 내솟고
그즈음 앵벌이는 또 사창굴 여느 꽃의 곪아 터진몸 찾아다니며
가장자리 나달나달 핀 종이쪽지 구걸 사연이라도 돌리는가
이 꽃의 음호(陰戶) 속에 저 꽃의 치골 위에
점, 점, 점 우연을 점 찍는가
*『잡아함경』'맹구설화' 중에서
시집『우연을 점 찍다』2009 문지
시인의 말
호랑이 등에 올라타고 달리면 끝장까지 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등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 ‘기호지세(驥虎之勢)’ 란 옛
말 그대로 시를 타고 달리다 어디쯤에서 나도 끝날 것이
다. 요즈음 운명이란 그런 것이고 삶 역시 그런 우연이란
생각에 곧잘 황홀해한다.
그동안 오래 더듬더듬 매만지던「마음經」도 일단 마무
리했다. 생각의 좀도둑질도 끝난 셈인가. 개별 시집으로
는 이번이 일곱번째다. 결코 부지런한 다수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밀고 갈 수 있는 한 갈 생각이다.
2009년 초여름
홍신선
- 1944년 경기 화성 출생. 동국대 국문과 同대학원
1965년『시문학』등단.
동국대 문창과 교수 퇴임.
현대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한국시협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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