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최서림 시읽기

폴래폴래 2009. 6. 6. 13:07

 

 

 

 

                                                  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조찬」* 읽기

 

                                                    - 최서림 

 

 

 

  이 천지간 어디 숨쉴 구멍 하나 없구나.

 

  심산계곡일지라도 정갈히 골라서 앉아야지, 햇볕 잘 드는 쪽 골라 매무새 다듬어 앉아야지, 도라지 꽃봉오리모냥 머리 흔들어 속엣것 다 씻어버려야지, 이가 시리도록 창자가 투명해지도록 훤히 다 헹구어 내어야지, 언젠가 내 마음에도 차돌부리 촉, 촉, 죽순 돋듯 하겠지, 왜놈이 무서워, 총칼로 덤벼보지도 못하고 산으로 들로 숨어들었다고 고백해 보건만, 실상은 구멍 때문이다. 구멍 없는 경성(京城), 구멍이 막혀가는 금강(金剛), 불길이 터져 나올구멍 찾지 못하는 가슴. 시원하게 구멍이라도 뚫어봐야지, 총 쏘듯 시나 갈겨 봐야지, 내 마음과 백화(白樺)의 마음 사이 붉은 찌끼로 막힌 구멍 한번 뚫어보려, 어깨가 내려앉도록 인대가 늘어나도록 밤새워 휘갈겨 봐야지, 논밭에서 호미도 못 쥐어보고 서러운 새 되어 홀짝홀짝, 흰 밥알이나 축내고 있는 늦은 아침. 머흘 머흘 골을 옮기는 구름. 아직 반쯤만 그 하늘을 열어놓고 늘 쫓겨다니는 마음에도 구름이 몇 점 서성이고. 가람처럼 기름이 철, 철, 흐르는 풍류(風流)도 아닌, 지훈처럼 느긋하게 헛폼 잡아보는 자적(自適)도 아닌, 뼈를 저리우는 시름을 짜내어, 땅깊이 묻어 두었다가 캐어 낸 글자에다 반질반질 발라 봐야지, 탄환인 양 만년필에다 차곡차곡 장착해 봐야지,

 

  해 ㅅ 살 피여

  이윽할 때까지

 

 

 

 

          * 「조찬」은 정지용의 작품임.

 

 

 

 

 

           林和論

 

                                               - 최서림

 

 

 휘두르는 칼날과 겨루어 이길 수 있는 것은

 공기와 바람,

 바람 안의 무수한 구멍들.

 칼날의 미친 춤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한량없이 흐르는 물,

 흐르는 물과 같이 구멍 많은 세월,

 그 세월을 빚어 내는 큰 구멍,

 그 구멍을 만든 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속도,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검은 쇠붙이의 회오리를 막으려고

 빈틈없는 논리와 끝없는 논쟁으로 달구어진 식민지의 쇠붙이,

 작두날마냥 벼리어진 청년이 있다.

 강화도조약과 함께 여백이란 무기를 잃어버린

 신경과민의 구멍 없는 붉은 청년.

 

 단련된다는 것은

 쇠꼬챙이처럼 딱딱해지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바람처럼 물렁물렁해지는 것인데

 작두날 같은 논리를

 물렁물렁하게 만들어주는 구멍을 배우는 것인데

 그 구멍을 만든 이를 아는 것인데

 

 북으로 쫓겨간 작은 쇳조각들,

 구멍으로 삼켜버리는 전략을 몰라

 더 큰 쇳조각에 부딪혀 박살나고

 

 

 

 

                 시집<구멍>2006 세계사

 

 

 

               - 1956년 경북 청도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과 同 대학원 박사.

                  1993년 『현대시』등단.

                  서울산업대 문창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