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 조은길
밤 사이 보슬비가 왔다갔을 뿐인데
담을 뒤덮은 붉은 장미 넝쿨
이 아침 불현듯 창문을 깨고 날아든 돌멩이같이
놀랍고도 황홀한 장미의 포즈
나는 눈이 찔린 듯 눈이 부시다
하지만 나는 시에 미친 여자
장미를 처음 본 듯 가슴에도 대어보고
코에도 비벼보고 가지를 흔들어보고
꽃을 빙빙 돌며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보는데
장미 꽃잎으로 목욕을 했다던 클레오파트라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장미만 그리다 죽은 화가
장미꽃바구니 장미예식장 장미아파트 장미모텔
장미미용실 장미의상실 장미향수 장밋빛머플러
장미쟁반 장미브로치 같은 언어들이
이미 머릿속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장미를 보았을 때
뒷걸음질치며 울었다던데
조금 커서는 장미를 꺾다 가시에 찔려 울었다던데
나는 이미 장미에게서 너무 멀리 온 것인가
하지만 나는 시에 미친 여자
장미는 추하다 시궁창이다 구더기이다
애꾸눈이다 눈물이다 사막이다 악마다 저주다
말을 바꾸어본다
눈을 씻어본다
-경남 마산 출생.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노을이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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