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박서영 시보기

폴래폴래 2009. 2. 26. 11:14

 

 

 

 

                                                      사진출처:네이버포토 

 

 

 

 

                   빈집             / 박서영

 

 

 

 댓돌 위에 나란히 놓인 신발 한 켤레,

 빨랫줄엔 며칠째 걷지 않은 듯한 옷과 이불,

 늦은 봄날 개복숭아 나무의 병실을 떠나

 기어코 짓뭉개져 가는 꽃잎들,

 들어가야 할 곳과 빠져나와야 할 곳이

 점점 같아지는 37세,

 시간의 계곡을 질주하는 바람,

 더 이상 내게 낙원의 개 짖는 소리는 들려주지 마!

 내용 없이 울어대는 새 몇 마리,

 

 저녁이 검은 자루처럼 우리를 덮는다

 

 

 

 

           숫눈             /박서영

 

 

 담벼락 아래

 누가 싸질러 놓은

 깨끗한 폐 한 덩어리

 

 숨쉬는 동안

 저기 숨어서 살았으면

 

 겨우내 녹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저렇게 흰 무덤을 찢고

 얄밉게 눈을 흘기며

 꽃이라도 필 것

 입 닥치고

 봄의 태반을 혼자 낳을 것

 

 白紙를 더럽히며

 햇빛이 뛰어 달아난다

 

 

 

 

            어디든 간다        / 박서영

 

 

 

  길을 바라보고 있으면 내 눈이 길게 늘어나 어디든 간다 햇살의 걸음걸이는 순식간이다 바퀴를 단 것처럼 빠르게 저녁이 내려온다 도로에 벌레 한 마리가 햇살 때문에 발버둥친다 햇살 때문에 나는 달아오른다 착시처럼 부풀어오르는 길 불타는 나무 불타는 사람 불타는 저녁이 되자 이 세계에는 한 줌 가량의 재만 남는다 스쳐간 사랑이 남긴 한 줌의 재 희망이 걷어차고 간 한 줌의 재 봄날의 담벼락이 남긴 화상자국처럼 시간은 검은 재를 남긴다 시간의 흔적으로 인해 길이 자주 찢어지고 절개지처럼 붉어졌다 나는 길의 돌출된 손잡이를 잡아당긴다 길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풀려 나온다 그래도 내 낡은 구두는 멈출 줄 모른다 구두 밑창에 나무가 집이 棺이 쩍쩍 달라붙기 시작한다 무수히 많은 길의 파편들, 탄식과 고통의 구멍을 스쳐 구두 밑창에 우울한 저녁은 스며든다 그래도 내 구두는 어디든 간다 정작 무거운 건 내 구두가 아니라 저 길이 아니었나 아아 도대체 나는 흩어진 길들을 수습하지 못하겠다 길마저 썩어 있다니

 

 

 

 

 

                          -1968년 경남 고성 출생.

                                 1995년 '현대시학'등단.

                                시집<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천년의시작.

 

 

 

 

'詩心의 향기 > 시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五月의 歡喜 / 김현승  (0) 2009.02.28
배롱나무 궁궐 / 강영은  (0) 2009.02.27
운주사 꽃 부처 / 강영은   (0) 2009.02.25
열무우꽃 / 김달진  (0) 2009.02.24
멧새 소리 / 백석  (0) 2009.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