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엽록체에 대한 기억

폴래폴래 2022. 1. 14. 09:52

       2020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엽록체에 대한 기억

 

                            이경주

 

 숲을 떠난 푸른빛의 기억이 갇힌 방으로 들어간다

 형광등 불에 달궈진 자갈과 모래알들이 바닥에 깔리어

 전갈이 지나는 길을 만들고 있다

 마른 바람이 눈에 익거나 때로는 낯선 발자국들을 지우는 한낮에는

 미세한 먹이사슬들이 잠깐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하얗다

 종일 내리쬐는 빛은 벽에 박힌 나무들의 뿌리와

 그걸 바라보는 죽은 새들의 밥상과

 좁은 틈새를 뚫고 머리를 든 작은 벌레들의

 핏줄까지 하얗게 만든다

 한번이라도 불빛에 닿은 것들은 제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오후가 저물 때면 변색의 관성은 더욱 강해져

 누구도 아침을 기억하지 못한다

 방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나갈 수 없다

 아무렇게 발을 들여 놓았다가

 깊은 사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폭풍에 갇히어 돌아설 수 없다

 여전히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표정이라고는 창백한 빛뿐인 고요한 방이

 암흑 속을 빠르게 날고 있는 소리가 들린다

 이상하다 분명 하루가 지난 거 같은데

 눈을 뜨면 다시 그 자리에 와 있고

 녹색이 사라진 방으로 계속 나비들이 날아 들어온다

 

 심사위원 : 이성모 평론가, 배한봉 시인

 

 -1963년 충남 홍성 출생. 서울대 농경제학과 졸업. 신한금융투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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