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폴래폴래 2014. 3. 4. 15:32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

  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

 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 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 가 그

 러하듯이

 

 

  시집『정본 백석시집』문학동네 2007

 

 

 

  - 본명 백기행. 1912년 평북 정주 출생.

    오산고보, 일본 아오야마 학원 졸업.

    1935년 조선일보에 定州城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시집<사슴>간행. 해방후 고향에 머물다

    1995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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