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푸른 계절이 왔네 / 허수경

폴래폴래 2010. 3. 10. 17:29

 

 

 

 

 

  푸른 계절이 왔네

 

                               - 허수경 

 

 

 지난 해 사과나무는 휴식을 취했네

 그리고 올해

 

 저렇게 많은 아이들이 사과나무에게로 왔네

 가지에다 저렇게 수많은 방을 걸어두고

 나무는 아이들을 기다렸었지

 

 푸른 계절이 시작될 무렵, 나무는 나에게 말했어

 방을 보았니?

 텅 빈 햇살 안에 열린 잠든 방을 보았니?

 그 방 안에 푸른 우물이 하나 있지?

 

 그게 너야

 손톱을 깍아줄 아이 하나 없는 너를 위하여

 계절은 딱딱한 아이 하나를 데려왔어

 

 사과나무 밑에 서면 먼 노래가 들리는 듯

 아직 누구도 듣지 못한 노래가 이 지상에 남아 있다는 듯

 

 푸른 아이들이 부르는 즐거운 노래

 푸른 아이들이 즐기는 그리운 시절

 스물에 버린 조갑지 같은 화장품갑에도

 이런 냄새가 났으면 했어

 

 푸른 머리칼을 가진 저 잎새들의 저녁이면

 어둠도 푸른 물에 들었네

 입술을 열면 당신의 혀가 내 입 안에 든 것 같아

 사랑노래를 부르며 랄랄랄

 나는 딱딱한 아이를 위해 여린 손톱을 자를 준비를 했네

 

 휴식을 취하고도 손톱에 분홍물 들여줄

 아이 하나 없던 나에게도

 방 하나 주시는 계절이 왔네

 사랑이 먼 휴식을 취할 때 고단했던 몸도 푸르러져

 만취의 햇살이 사과나무의 방을 빼곡히 채울 계절 뒤에

 

 저 아이를 깨물면 나를 깨무는 거라서 거나하게

 나의 몸으로 취할 계절이 오고 있네

 

 

 

  『시인세계』2010년 봄호

 

 

 

 

  - 1964년 경남 진주 출생. 경상대 국문과 졸업.

    1987년『실천문학』등단.

    시집<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혼자 가는 먼 집>  현재 독일 거주.

 

 

 

 

'詩心의 향기 > 시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 이근화  (0) 2010.03.11
눈썹 / 김혜순  (0) 2010.03.10
고백 / 남진우  (0) 2010.03.09
과수원 / 고영민  (0) 2010.03.08
꽃눈이 번져 / 고영민  (0) 2010.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