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과수원 / 고영민

폴래폴래 2010. 3. 8. 18:27

 

 

 

 

 

  과수원

 

                   - 고영민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

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했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통을 젓는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썻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

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종일 약통에다 뭐라 썻

는지 내 다 안다,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 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

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시집『공손한 손』창비 2009

 

 

 

 

  -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창과 졸업

    2002년『문학사상』신인상 등단.

    시집<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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