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수원
- 고영민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
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했빛에 앉아 막대기로 커다란
농약통을 젓는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썻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
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종일 약통에다 뭐라 썻
는지 내 다 안다,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 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
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시집『공손한 손』창비 2009
-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창과 졸업
2002년『문학사상』신인상 등단.
시집<악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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