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노란 붓꽃 / 장승리

폴래폴래 2010. 1. 28. 10:07

 

 

 

 

 

   노란 붓꽃

 

                            - 장승리 

 

 

 

  이 책의 4페이지를 보세요 계단에 갇힌 당신이 책을 건네주며 소리치네 갈피 사이에 잘 마른 붓꽃이 놓여 있네 꽃을 건네려는 순간 당신은 사라지네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꿈에서 깨네 어제 주워 온 의자에 내가 앉아 있네 어떤 질문에도 아니요 라고 대답하던 내가 내게 질문을 멈추자 비로소,

 

  해명거리를 찾지 않게 될 때 뼛속까지 투명해질 거야 몸속이 호수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수심(水深)을 이룰 거야 수면 위로 비치는 당신 물그림자에서 당신만 떼어낼 거야 오려서 색종이로 팔 거야 색종이 사세요 색종이 사세요 한밤중에도 외칠 거야 메아리에 부딪혀 파선된 별들에게 종이 왕관을 씌어 줄 거야 빙빙 돌아도 숨이 차도 너-무-힘-들-어 라고 발음하던 당신의 마지막 입 모양을 흉내 내지 않을 거야 너무 힘들다는 것은 너무 길다는 것 당신을 휘감고 사라진 회오리 계단도 쓸고 가지 못한 당신의 긴 발자국을 끝까지 읽을 수 없을 거야 쓸쓸한 독서 끝 잔상으로 남은 회색 하늘을 검지 끝에 올려놓고 빙빙 돌릴 거야 그 하늘 아래에서는 뒤를 살피지 않고 설거지를 할 수 있을 거야 갑자기 라디오 볼륨을 줄이지 않아도 될 거야 표정 하나도 죄가 될 수 있기에 대답할 수 있을 거야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안녕, 또 물어도 안녕,

 

 

 

 

  - 『서정시학』2009년 겨울호

 

 

 

  - 2002년 중앙신인문학상 등단.

    시집<습관성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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