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10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폴래폴래 2010. 1. 13. 16:09

 

 

 새의 낙관(落款)

 

                           - 정영희

 

 

 새들에게 있어서

 낙관이라는 습관은 오래된 풍습이었다

 문신을 새긴 암벽마다 둥지가 되었고

 뜨뜻한 아랫목이 되었으므로

 발톱을 날카롭게 세우고 부리를 비벼 족적을 남기는 일은

 축제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족적이란 새들의 풍향계였다가도 천적에게는

 눈물일 수 있는 것

 바닷가의 익룡 발자국 또한 그러했으리라

 

 묵화 한 점 쳐 놓고 낙관을 해야 할 여백을 놓쳤다

 자작나무 숲 물안개 사이로 새들이 까맣게 앉아 있었다

 그루터기마다 태점(苔點)을 찍어놓은 듯 했다

 부리는 날카로웠지만 발톱은 무뎠으니

 새벽이 되도록 새들은 칠흑의 어둠을 방황해야 했다

 

 돌아갈 곳 없는 묵화 속의 새들

 강물에 먹물로나 풀어져 쪽배마냥 흘러가길 기다렸다

 딱딱거리는 딱따구리는 한 칸짜리 초가집이 전부였으니

 헛간이라도 한 곳 덧댔으면 좋으련만

 이미 붓을 말끔히 빨아버린 뒤였다

 

 한 무리의 새들이 화선지 밖으로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잠시 흐름을 멈춘 강물 위에 낙관을 찍었다

 

 푸드덕, 새들이 도처에서 솟구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