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포토
자작나무 사원
- 최정란
누가 이 말들의 고삐를 땅 속 깊이 묶어 놓았나
딛고 선 검은 땅, 견고하게 뿌리내린 긴 다리로
정신의 지평선 어디나 한 달음에 닿는 흰 말들
초록갈기 휘날리는 거침없는 질주를 본다
우점종, 활엽의 지붕 아래
한 자리에 모여 서서 천 년쯤 내닿는 무구한 풍경은
가지와 줄기와 몸통의 희디 흰 나날들이어서
숲길을 걸어 바이칼로 가는 동안
천마도를 숨기고 있는
수막의 내피를 슬쩍 뒤집어 보여주기도 하는 흰 얼굴은
시간을 뛰어 넘는 영웅을
기다린 흔적이 역력하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도착하였으나
추신까지 읽어도 행간이 해독되지 않는 편지,
살아있는 목간에는
세로로 길게 자작의 서명이 뚜렷하여,
귀족의 품격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말들은 바람의 목구멍 깊이 울고
늘어선 열주의 흰 기둥들 정연한 질서를 거느려
한 그루마다 한 채의 사원을 몸에 지녔다
엄결한 사제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스스로 성소이며 경전인 나무들
한 전생이 저 나무의 한 잎 이었을 터
길을 빼곡히 메운 흰 옷 입은 시민들 틈에 서서
백의종군하는 순신의 차림으로
먼 귀양길의 약용을 향해 손을 흔든다
말 울음소리 품은 알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한 평 황무지, 마음의 시베리아, 마침내
얼음과 모래를 걷어내고 자작의 묘목을 심어야 할 때
『시인시각』2009년 봄호
- 1961년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 영문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여우장갑』문학의전당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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