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자작나무 사원 / 최정란

폴래폴래 2009. 6. 29. 12:04

 

 

 

                           사진:네이버포토

 

 

 

 

           자작나무 사원

 

                                              - 최정란 

 

 

 

 누가 이 말들의 고삐를 땅 속 깊이 묶어 놓았나

 딛고 선 검은 땅, 견고하게 뿌리내린 긴 다리로

 정신의 지평선 어디나 한 달음에 닿는 흰 말들

 초록갈기 휘날리는 거침없는 질주를 본다

 

 우점종, 활엽의 지붕 아래

 한 자리에 모여 서서 천 년쯤 내닿는 무구한 풍경은

 가지와 줄기와 몸통의 희디 흰 나날들이어서

 숲길을 걸어 바이칼로 가는 동안

 천마도를 숨기고 있는

 수막의 내피를 슬쩍 뒤집어 보여주기도 하는 흰 얼굴은

 시간을 뛰어 넘는 영웅을

 기다린 흔적이 역력하다

 긴 여정 끝에 마침내 도착하였으나

 추신까지 읽어도 행간이 해독되지 않는 편지,

 살아있는 목간에는

 세로로 길게 자작의 서명이 뚜렷하여,

 귀족의 품격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만

 

 말들은 바람의 목구멍 깊이 울고

 늘어선 열주의 흰 기둥들 정연한 질서를 거느려

 한 그루마다 한 채의 사원을 몸에 지녔다

 엄결한 사제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스스로 성소이며 경전인 나무들

 

 한 전생이 저 나무의 한 잎 이었을 터

 길을 빼곡히 메운 흰 옷 입은 시민들 틈에 서서

 백의종군하는 순신의 차림으로

 먼 귀양길의 약용을 향해 손을 흔든다

 

 말 울음소리 품은 알이 긴 잠에서 깨어나는

 한 평 황무지, 마음의 시베리아, 마침내

 얼음과 모래를 걷어내고 자작의 묘목을 심어야 할 때

 

 

 

               『시인시각』2009년 봄호

 

 

 

                 - 1961년 경북 상주 출생. 계명대 영문과 졸업.

                   2003년 <국제신문>신춘문예 당선.

                   시집『여우장갑』문학의전당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