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포토
아이스크림과늑대
- 이현승
도망을 이해하려면 말야
아이스크림을 봐
표정을 바꾸는 변검술사의 손놀림처럼
재빠르게, 혹은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지
아이스크림이 녹지
아이스크림은 포효하고
아이스크림은 분노하고
아이스크림은 자살 협박을 하고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려
아이스크림은 도망을 이해할 수 있지
동물원을 탈주한 늑대처럼
아이스크림은 도주하지
아이스크림은 사라지지
가령, 날렵한 혓바닥은
흔적을 지우면서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꼬리 같아
도망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늑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눈을 밝히겠지
늑대들은 새빨간 혓바닥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처럼 아이스크림은 녹아내리지
잽싼 손놀림을 가질 수 있다면
나는 완전히 투명에 가까워질 수 있지
잠시 흔들렸다가 원래의 모양으로 돌아오는 물주름
어느 날 위치가 바뀌어 있는 책상 위의 물건들처럼
혹은 아이스크림처럼, 또 늑대처럼 나는 사라지지
시집『아이스크림과늑대』랜덤하우스2007
시인의 말
참혹해할 필요 없다.
늦은 일요일 쇼펜하우어로부터의 연락,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을지 모른다.
밤 사이에 늘어난 환자의 전문지식이
주치의의 처방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다.
진열대의 빈자리는 금세 메꾸어질 것이며
나는 통조림에도 고유번호가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과 절망을 동시에 느낀다.
우리는 그 무엇을 위해 살고 있고
그 무언가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조금 우울해질 수는 있다.
괜찮다.
2007년 여름
이현승
-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19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2002년『문예중앙』신인문학상 등단.
고대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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