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포토
시여, 잠시만 비껴주세요
- 김미령
곧추 앉은 등뼈 속으로 차가운 한줄기 물과 꿈이
미간에서 정수리 지나 꼬리뼈 아래로 흘러내리는 기분을
까닭 없이, 느껴도 될까, 사치스럽게 ‘환희’라 불러도 될까,
높은 창과 낮은 피아노 음률이 선물한 깨끗한 시간,
내 호흡이 드나드는 저 밑바닥 섬모가 불을 켜며 일어서는 느낌,
뒷목덜미를 쓸어 올리는 상쾌한 한기,
팔을 뻗으면 아무것도 닿지 않는 꽉 찬 진공,
내 시에게 가장 먼저 허락받아야 할 것 같은 이 가벼움을
탁 털면 이슬처럼 날아가 버릴 듯한 이 위태로운 가벼움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고스란히 내 손끝에게 건네줘도 될까,
내 의식이 거짓말 하면 내 혈관과 물관에게,
그것도 너무 신비로우면 그냥 귀를 스치는 바람에게,
우연히 옆을 지나는 날벌레의 날개 위에, 살짝 얹어줘도 될까,
천연스레 평온한 미소를 지어도 될까, 그 외
암 것도 몰라, 그대로 상상 속으로 미끄러져
고원에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을 고속촬영한 다큐처럼
에델바이스든, 꿩의바람꽃이든, 세상 모든 꽃이 순식간 벌어져서
그 옆에 분홍빛 항문을 벌름거리는 살찐 말이 되어
그윽한 향기에 피가 먼저 취하는 때를,
조심스레 말해도 될까,
시여, 잠시만 비껴주세요.
- 1975년 부산 출생. 부경대 국문과 졸업.
2005년 《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
'詩心의 향기 > 시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모텔 미라지 / 유현숙 (0) | 2009.06.15 |
|---|---|
| 나비병동 / 이민하 (0) | 2009.06.14 |
| 독거미 / 김지유 (0) | 2009.06.14 |
| 칸나 / 송찬호 (0) | 2009.06.13 |
| 낚시 유배 / 김선태 (0) | 2009.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