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네이버포토갤러리
모델 / 이민하
난 당신이 좋아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어. 캔버스를 두 눈에 끼고 당신을 만나는 날이 많아졌어. 무릎 위에 잠든 당신의 머리털을 벗기고 치렁치렁 드리우는 고요한 붓털. 헤어져 돌아와도 당신을 그리고 꿈에서도 당신을 마구 그리고, 방 안엔 그림이 넘치네. 우르르 당신을 몰고 나가 갤러리에 팔았어. 딴청을 부리는 당신을 그리고 멀뚱이 뒤돌아보는 당신을 그리고, 난 당신이 좋아서 광장에 팔았어. 캔버스가 필요해서 떨이로 팔았어. 당신을 많이 팔수록 난 캔버스 부자, 당신의 부자. 난 캔버스 왕국을 차릴 거야, 당신의 왕국. 산맥처럼 불끈불끈 이젤을 세우고 나무의 왕국 송충이의 왕국 구름의 왕국도 차리겠지. 난 당신이 좋아서 당신을 몰래 벗기고 당신을 몰래 덧칠하고 새벽마다 나이프로 북북 당신을 찢고. 그런 나를 무심히 가로채는 당신. 그런 당신이 좋아서 난 삐딱하게 흉물스럽게 그림을 자꾸 그리고, 난 당신이 너무 좋아서 나를 그리는 당신을 보고 싶어졌어. 당신을 그리다 말고 포즈만 생각했어. 나는 우뚝 멈추고 백치처럼. 피부를 긁어대며 백지처럼. 당신이 나를 그리고 나를 팔고 나의 왕국을 차려줬음 좋겠어. 무지개가 철거된 지하 단칸방이라도 좋겠어. 그러면 우린 같은 왕국에 있을까. 당신으로 살이 툭툭 터지는 나의 왕국을 무심히 따돌리는 당신. 그런 당신이 좋아서 난 삐딱하게 흉물스럽게 포즈를 자꾸 바꾸고, 휴일의 기상청이 봉합하는 해일에 불탄 어깨와 모래에 으깬 무릎. 지루하게 잇댄 밤과 낮의 해안선처럼 우린 정말 같은 왕국에 있을까. 누군가 그걸 알려주려면 그가 우리를 그려줘야 해. 그만이 우리의 왕국을 차려줄 수 있어. 당신은 사슴 같은 백성의 눈빛으로 아이를 구걸하네. 나는 백지장 같은 유방에서 융기된 붓 하나를 당신의 입에 물리고, 난 당신이 좋아서 누군가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로 했어. 포즈를 취하다 말고 누군가만 생각했어. 낯선 그에게 꼭꼭 여몄던 붓을 꺼내주네. 당신을 잠시 미루고 포즈를 살짝 풀고서 그에게 그림을 가르쳤어. 그가 우리를 그리고 우리를 팔고 우리의 왕국을 차려줄 거야. 여름의 해변과 겨울의 고양이에게도 붓을 꺼내주네. 파르르 떨리는 살점을 찍어 그들이 덧칠하고 지우는 캔버스에 일파만파 이식되는 우리의 왕국. 그러면 우린 같은 왕국에 있을까. 난 당신이 좋아서 온몸엔 물고기가 넘치고, 뻐끔뻐끔 피를 빨며 피부 위로 솟구쳐 오르고. 우리는 평생 부패하지 않는 연인처럼 식욕이 넘치고, 누군가 우리를 나란히 겹쳐놓고 창밖으로 첫눈 같은 소금을 뿌리네. 그런데 우린 같은 왕국에 있을까. 손끝의 소금기를 말리고 잠시 창문을 들여다 보는 우린, 갤러리에서 광장으로 이어진 끝없는 캔버스 밖에 있기는 할까.
- 2000년 '현대시'등단. 시집<환상수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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