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운영 꽃밭에서 검은 염소와 놀다 / 김선우
보랏빛이 검은 염소를 쓰다듬는다 가만히 온 노을
속 검은 염소가 보랏빛을 조금 찢어 입속에 넣고 우
물 거린다 염소의 몸속 기나긴 회랑과 언덕을 적시고
철조망에 매달아놓은 녹슨 방울을 울리듯 젖멍울로
조금씩 스며 나오는 보랏빛, 소녀가 검은 염소의 젖
멍울에 입술을 갖다댄다 네 눈이 좋아 아무것도 바라
보고 있지 않아서 ─
내 고향은 검은 염소와 자운영 꽃밭, 갈 곳 없는
노을이 나를 낳았대요 꽃과 혼혈이어서 나는 손톱이
조그맣구요 여섯 개의 꽃잎 손으로 무른 밥을 먹지요
목마르면 검은 엄마의 젖을 빨구요 뿔에 걸린 달님을
조금씩 부스러뜨렸어요 그때마다 젖니가 빠지고 쌍
꺼풀이 커다래져서 친구들은 금세 나를 잊었지만, 괜
찮아요 내 고향은 검은 염소와 자운영 꽃밭이니까요
검은 염소의 배 밑에 붙어 보랏빛을 마시는 보랏
빛, 까르륵대며 종알종알 뛰어다닌다 그런데 언니도
혼혈이에요? 갈 곳 없는 노을이 언니를 낳아 버렸어
요? 괜찮아요 울지 마요 내가 다시 낳아줄게요 쉬잇,
이번엔 버리지 않을게요
그런데, 혼혈이 아닌 목숨도 있나요?
- 1970년 강릉 출생. 1996년 창비 등단.
2004년 현대문학상 수상. '시힘'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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