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폴래폴래 2009. 4. 13. 20:42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지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중앙대 문창과 졸업.

                  2002년 문학사상 신인상 등단.

                  시집<악어><공손한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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