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의 오솔길/시창고

추억에 대한 경멸 / 기형도

폴래폴래 2009. 2. 23. 11:00

 

 

 

 

 

 

 

                  추억에 대한 경멸         /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 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 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 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 1960년 경기 연평 출생. 연세대 정외과 졸업.

                             1984년 중앙일보사 정치, 문화부 기자.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안개'당선.

                             1989년 3월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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