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2008 제9회 동서커피문학대상 수상작

폴래폴래 2008. 10. 22. 22:22

 

 

<2008 제9회 동서커피문학대상>

 

         침엽의 생존방식          /  박인숙

 

   활엽을 꿈 꾼 시간만큼 목마름도 길어

   긴 목마름의 절정에서 돋아난 가시들

   침엽은 햇살도 조금 바람도 조금

   마음을 말아 욕심을 줄인다

 

   대리운전하는 내 친구 금자

   밤마다 도시의 휘청임을 갈무리 하는 사이

   보도 블록 위에 포장마차로 뿌리 내린 민수씨

   그들은 조금 웃고 조금 운다

   바람 속에 붙박혀 시간을 견디는 일이

   침엽의 유전자를 가진 자들의 몫이므로

   뾰족이 가둔 눈물이 침엽의 키를 늘이고

   세월을 새겨 가는 것

 

   그들의 계절에는 극적인 퇴장

   화려한 등장 따위는 없다

   한가한 날 고작 흰 구름 몇 가닥 바늘 끝에 걸쳐두거나

   흐린 겨울 하늘이 너무 시릴 때

   눈꽃으로 피사체를 만들어 보거나

 

   혹한의 계절에도 홀로

   숲의 푸른 내력을 지키는 건 침엽이다

   그들의 날카로운 생존방식이 숲을 깨우고

   바람의 깃털을 고른다

   햇살도 이 숲에선 금빛으로 따끔 따끔 빛난다

 

 

          <은상>

            은행나무의 안부     김택희

 

   우편배달부는 내가 사인을 하는 동안에도

   흰 봉투에 새겨진 길을 살피느라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가 건네 준

   은행잎으로 만들었다는 푸른 알약들

   안부를 묻는 지인의 손길처럼 싱싱하다

   몸 속 오지의 좁은 길까지

   큰 혈관으로 혹은 미세혈관으로

   길을 터준다고 했다

 

   요즈음 나는 가끔씩

   자주 다니던 길 위에서 헤맬 때가 있었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했다

 

   굽은 길 위에 서 있던 우편배달부도 돌아간 어둑 저녁

   은행나무 아래에 선다

   푸들푸들 바람 비벼 나누는 인사

   잎 잎으로 뻗은 손 흔들고 있다

   동서남북 흩으진 지구인에게 안부를 묻고 싶어져

   이 저녁 나는

   키 큰 한 그루의 여름 은행나무로 선다

 

        <은상>

           바람의 본적         / 류명순

 

   바람의 신경은 온통 깃발에 쏠려 있다

   모든 걸 흔들어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바람의 입이 물고 흔들어대는 저 초록의 산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날개들이 있다

   벼랑 끝에 서서 암 덩어리처럼 뭉쳐진 소나무를 보았다

   전신에 바늘이 박힌 채 하늘 향해 흔들리고 있었다

   몇 만 번의 흔들림으로 나이가 먹었을 그 소나무

   수많은 바늘을 꽂고 호젓이 저물어 갔다

   바람의 본적을 묻고 싶다

   내가 모르는 어느 별에다 호적을 두고 온 것인지

   히말리아보다 몇 배의 습곡이 되었을 바람의 역사

   나의 날은 늘 흔들림의 날들이었다

   낮달처럼 그림자도 없이

   그렇게 바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망치도 없이 등이 휜 여자의 늙은 뼈에

   수 천 개의 구멍을 뚫은 바람

   나도 오래된 무처럼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본적이 어디인지도 모를 그 바람을 쫓아

   어석어석 살아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