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미화 그늘
유현숙
비는 기별 없이 와서 가까운 바다를 두들겼다
바닷가 절집이 물에 잠겨 있다
첨벙대며 마당을 가로질러 물 고인 돌계단을 딛는
발아래가 염화다
문득 비 그치고
꽃잎 붉게 지는 동안
하루가 저물고 절집이 고요하다
자미화 그늘도 본래로 돌아가 누웠다
은빛소리라든가 눈엽이든가 수첩에 적어 두었던 낱말들이
고요 속에서 낱낱이 눈 뜬다
미혹의 그늘에서 이만큼까지 몹시
잠기고 매듭진 자리에서 저만큼까지 몹시
마음이 들고난 자리에서 이만큼까지 몹시
지난 하루가 감감해지는 저만큼까지 몹시
절집에 저녁이 오고 어둠이 들고 가섭은 가고
떨어져 뒹구는 저 꽃빛 닿지 않은 기별인가
시집<몹시> 상상인 2021
2001 동양일보, 2003년 문학.선 으로 등단
시집<서해와 동침하다><외치의 혀>
제10회 미네르바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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