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 / 김겨리

폴래폴래 2019. 10. 30. 10:53




      세상에서 가장 긴 문장


                           김겨리



 나무들이 발톱을 보일 때는

 자신의 마지막 상처를 드러낼 때다

 나무들은 일 년에 한 번씩 발톱을 세우는데

 그늘을 산란할 때 가장 예민해진다


 나무들이 흔들리는 것은

 그늘을 이소시키기 위해 뛰어내릴 준비를 하는 것

 허공의 출구가 열리는 때를 기다려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그때 떨어지지 않으려

 나뭇가지를 꽉 움켜쥔 그늘의 불거진 힘줄을 본 적 있는가


 나뭇잎 하나 떨어질 때 나무는 태연한 것 같지만

 이파리 하나 흔들기 위해 뿌리까지 흔들려야 했다


 앞뒤가 없는 나무는 옆으로 나뭇가지가 자란다

 그건 나무가 그늘에게 젖을 물리는

 산모의 자세이다


 잎망울에서 낙엽이 되기까지

 수많은 나뭇잎의 일생을 일일이 기억하는 나무는

 경전도 교리도 없는 바람의 유일한 종교,

 바람의 신도들은 수시로 나무를 향해 제를 올린다


 잎맥은 나무의 실핏줄,

 어린순 때부터 떠듬떠듬 혈서를 쓰기 시작하는 나무는

 한 번도 떼지 않고 일생을 기록한

 한 문장으로 된 비망록이다




 시집『나무가 무게를 버릴 때』시산맥사 2019년




 1962년 경기 안성 출생. 본명 김학중, 홍익대 졸업. 2015년 농민신문 등단

 시집< 분홍잠> 김만중문학상, 웅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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