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들
-하재연
남아 있는 시간의 등뒤를
잃어버린 시간의 머리가 바짝 쫓아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추월당하고 나면
사용할 수 있는 꿈의 염료가 바닥나버릴 텐데
더이상
영혼의 그릇이 없습니다.
양전하와 음전하들이 무수히
몸을 흐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배열이 이루어지고
나의 몸은 눈을 뜰까요?
번쩍, 하고 새 생명을 얻어 노란 벽돌길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을까요?
전쟁을 음악처럼 여기며 태어난 아이들이
나의 얼굴을 닮아가는 무서운 장면이 상영되는 극장에서
스크린을 다시 검게 칠하고
처음 보는 자막들을 배열해보기로 합니다.
아르곤은 아르곤과
제논은 제논과
너에게서 떠오른 얼룩들을 나의 피와 잘 섞어서
태양과 별들 속에 타고 있는 언어를 잠시 빌려오기로 합니다.
흐물흐물 덩어리들이 우리의 뇌를
희박하게 하나의 세계로 만듭니다.
나는 경건하게 새 옷을 입고
나의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시간들을 열심히 증류하였습니다.
나의 2인칭과 3인칭도 연기처럼 빠져나왔습니다.
『문학동네』2015년 가을호
-1975년 서울 출생. 고대 국문과 동 대학원 문학박사.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라디오 데이즈><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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