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다
- 심재휘
감 하나가 가지를 떠나
제가 만든 그늘 속으로 떨어졌다
대책 없이 드러나는 건 매양 속살인 듯
붉게 무른 곳에서
질척거리는 거리로 흘러나온 마음이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는다
이별의 어떤 연유가 흥건히 묻은 땅바닥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감이 그으며 내려온 선을 거슬러 오른다
그가 둥둥 떠 있던 허공의 어떤 행복까지
뒷걸음질쳐보고 싶은 저물녘에
나는 닿아 있는 것이다
뒷걸음으로 골목을 돌아나가서
까마득히 먼 길 끝
비오는 그해 가을로 뒷걸음질 하면
아직도 그 사람은 거기 있을 것도 같고
우산을 접고 들어가 창가 그 자리에 벌떡 앉으면
감았던 눈을 뜨고 흩어지던 날숨들을 거두어들이면
잃었던 사랑을 다시 찾을 것 같은데
끝내는 떨어져 가랑비 맞는 감
떨어지고 나서도 마저 익어가는 감 하나가
오늘은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아서
가슴 속 녹슨 태엽을 감듯 뒷걸음을 걸어보는데
뒤뚱거리며 앞으로만 가는 저녁을
이 몸은 벗어날 수가 없다
『서정시학』2014년 가을
- 1997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그늘><중국인맹인인안마사> 등. 현대시 동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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