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다 / 심재휘

폴래폴래 2014. 10. 31. 17:28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다

 

                                                     - 심재휘

 

 

감 하나가 가지를 떠나

 제가 만든 그늘 속으로 떨어졌다

 대책 없이 드러나는 건 매양 속살인 듯

 붉게 무른 곳에서

 질척거리는 거리로 흘러나온 마음이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는다

 

 이별의 어떤 연유가 흥건히 묻은 땅바닥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감이 그으며 내려온 선을 거슬러 오른다

 그가 둥둥 떠 있던 허공의 어떤 행복까지

 뒷걸음질쳐보고 싶은 저물녘에

 나는 닿아 있는 것이다

 

 뒷걸음으로 골목을 돌아나가서

 까마득히 먼 길 끝

 비오는 그해 가을로 뒷걸음질 하면

 아직도 그 사람은 거기 있을 것도 같고

 우산을 접고 들어가 창가 그 자리에 벌떡 앉으면

 감았던 눈을 뜨고 흩어지던 날숨들을 거두어들이면

 잃었던 사랑을 다시 찾을 것 같은데

 끝내는 떨어져 가랑비 맞는 감

 

 떨어지고 나서도 마저 익어가는 감 하나가

 오늘은 가랑비 오는 저녁에 닿아서

 가슴 속 녹슨 태엽을 감듯 뒷걸음을 걸어보는데

 뒤뚱거리며 앞으로만 가는 저녁을

 이 몸은 벗어날 수가 없다

 

 

 

 『서정시학』2014년 가을

 

 

 

 

 - 1997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

    <그늘><중국인맹인인안마사> 등. 현대시 동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