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봄, 우아한 게임 / 박연준

폴래폴래 2013. 7. 2. 11:43

 

 

 

 

 

 

 

 

 

  봄, 우아한 게임

 

               

                                                     - 박연준

 

 

 

 봄은 스무 개의 발이 달린 다족류의 몸으로 걸어다닌다

 투명하게 찍힌 봄의 발자국

 유리창에 이마를 기댄 햇빛

 

 아버지는 쓰러지길 기다리는 볼링 핀처럼

 봄의 길목에 서 있었다

 거대하게 몸을 부풀린 색색의 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오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부터

 가장 낮은 빛깔을 향해,

 

 봄은 잔뜩 둥글린 색채를 흩뿌리며 쏟아진다

 

 자신의 몸을 때려눕히리라 예감했는지

 아버지는 점점 목이 가늘어졌다

 이윽고 봄의 공격이 시작되고

 가늘어지는 것들은 어디로 피해야 하나

 

 아버지의 몸 곳곳에 멍이 퍼졌다

 무늬를 흉내 내며 살랑거리는 저 어둠,

 도망가는 뱀처럼 기다랗게 번지고

 커다란 접시 같은 몸이 보랏빛을 떠받들고 있었다

 

 보랏빛은 줄을 서지 않는다

 보랏빛은 발걸음이 가볍다

 보랏빛은 침착한 표정으로 번진다 웃으면서

 보라, 보라, 보랏빛!

 

 종이비행기처럼 납작하게 접힌 아버지

 하늘로 날아가신다

 

 

 

 시집『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문학동네 2012년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 당선.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