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 길
- 박형준
4월의 어느 바닷가 봄밤엔
낙지가 바다 밑을 기어온다지요
진달래꽃을 따 먹으러
뭍으로 올라온다지요
당신과 남산의 계단을 오르고
타워를 오르고,
햇빛으로 빛나는 꼭대기 창에 매달려
우리는 바닷가에 가기로 약속을 했지요
그날은 서해 바다가 저 멀리 떠오르는 맑은 날이었지요
내려오는 길에는 당신과 남산의 진달래 길을 걸었지요
당신은 저에게 주려고 진달래를 따서 옷자락에 가득 채웠지요
그런 뒤로 저는 당신의 옷에서 향기가 날 때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꽃을 딴 것은 아닌지
당신의 냄새를 맡아보곤 했지요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 다리를 절던 당신,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의 경계에서 어느 순간
하늘이 맑아지고 다시 꽃이 피어납니다
이제는 저 혼자 그 길에서
저만치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지만,
당신이 절뚝거리며 따 준 꽃 냄새는
봄물 같은 투명한 하늘에 떠서 흘러가고 있네요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와 나눌 수 없는
봄이 오지만, 아직도
당신과 거닐던 진달래 길에는 봄빛이 맑아
무언가 정겨운 마음이 번집니다
봄밤의 바닷가 사람들이
홰바리라 부르는,
횃불로 낙지잡이를 한다는
당신과 끝내 가보지 못한 그 바다,
당신이 절뚝이며 꽃을 따 주던 진달래 꽃길에
바다 밑을 숨죽이며 뭍으로 기어오르는
낙지 한 마리, 그렇게 봄빛이 오고 있습니다
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지 2011
-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춤>
동서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詩心의 향기 > 시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멍 / 박형준 (0) | 2013.04.18 |
---|---|
오랑캐꽃 / 최서림 (0) | 2013.04.17 |
가정요리대백과 / 권혁웅 (0) | 2013.04.16 |
無諍三昧, 분홍꽃 / 한영옥 (0) | 2013.04.15 |
꽃과 밥 / 마경덕 (0) | 2013.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