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진달래 길 / 박형준

폴래폴래 2013. 4. 16. 13:07

 

 

 

 

 

 

 

 

 

   진달래 길

 

                                 - 박형준

 

 

 4월의 어느 바닷가 봄밤엔

 낙지가 바다 밑을 기어온다지요

 진달래꽃을 따 먹으러

 뭍으로 올라온다지요

 

 당신과 남산의 계단을 오르고

 타워를 오르고,

 햇빛으로 빛나는 꼭대기 창에 매달려

 우리는 바닷가에 가기로 약속을 했지요

 

 그날은 서해 바다가 저 멀리 떠오르는 맑은 날이었지요

 내려오는 길에는 당신과 남산의 진달래 길을 걸었지요

 당신은 저에게 주려고 진달래를 따서 옷자락에 가득 채웠지요

 그런 뒤로 저는 당신의 옷에서 향기가 날 때마다

 당신이 저를 위해 꽃을 딴 것은 아닌지

 당신의 냄새를 맡아보곤 했지요

 

 어렸을 때 열병을 앓아 다리를 절던 당신,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의 경계에서 어느 순간

 하늘이 맑아지고 다시 꽃이 피어납니다

 이제는 저 혼자 그 길에서

 저만치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지만,

 당신이 절뚝거리며 따 준 꽃 냄새는

 봄물 같은 투명한 하늘에 떠서 흘러가고 있네요

 

 이제는 더 이상 누군가와 나눌 수 없는

 봄이 오지만, 아직도

 당신과 거닐던 진달래 길에는 봄빛이 맑아

 무언가 정겨운 마음이 번집니다

 

 봄밤의 바닷가 사람들이

 홰바리라 부르는,

 횃불로 낙지잡이를 한다는

 당신과 끝내 가보지 못한 그 바다,

 당신이 절뚝이며 꽃을 따 주던 진달래 꽃길에

 바다 밑을 숨죽이며 뭍으로 기어오르는

 낙지 한 마리, 그렇게 봄빛이 오고 있습니다

 

 

 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지 2011

 

 

 

 

- 1966년 전북 정읍 출생. 1991년<한국일보>신춘문예 당선

   시집<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춤>

   동서문학상, 현대시학작품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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