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물과 높이
- 오규원
밤새 눈이 온 뒤 어제는 지워지고 쌓인 흰 눈만 남은 날입니다
쌓인 눈을 위에 얹고 物物이 허공의 깊이를
물물의 높이로 바꾸고
나뭇가지에서는 쌓인 눈이 눈으로 아직까지 그곳에 있는 날입니다
뒤뜰에 붙은 언덕의 덤불 밑에는 오목눈이와 멧새와 지빠귀와
그리고 콩새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먹이를 찾고
새들이 먹이를 삼킬 때마다
덤불 밖의 하늘이 꼬리 쪽으로 자주 기우는 날입니다
직박구리 한 쌍이 마른 칡덩굴이 감고 있는 산수유에 앉아
노란 꽃이 진 자리에 생긴 붉은 열매를 챙기고
열매가 사라진 자리에는 허공이 다시 그 자리를 메우고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콩새 한 마리가 급히 솟구치더니
하늘에 엉기고 있는 덩굴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가서는
몸을 그곳의 하늘에다 깨끗이 지우는 날입니다
시집『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문지 4쇄 2004년
- 1941년 경남 삼랑진 출생. 동아대 법대 졸업.
1968년 현대문학 으로 등단.
시집<분명한 사건><순례><왕자가 아닌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길, 골목, 호텔 긔고 강물소리><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수상.
서울예대 문창과 교수 역임. 2007년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