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비 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 김선우

폴래폴래 2011. 3. 3. 23:36

 

 

 

 

 

 비 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 김선우

 

 

 

 비가 내린다 오늘은 (죽은 門이 생피를 흘리듯)

 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

 빗줄기는 말랐구나 아, 나는 빗소리처럼 비만하구나

 

 오래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고

 핏대를 세운 발꿈치를 들며 비 오는 오늘은 박물관에 갔네

 세상 어디나 있는 식기들(한참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지는,

 더 한참 들여다보면 슬픔이 자글거리는)

 총칼들 갑옷들 각종 서류들 인장들

 

 목 없는 마네킹에 입혀진 화려한 실크 드레스

 아아 추워라, 우리의 고향은 정거장

 오늘의 권력자에게 이 질긴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네

 당신이 죽은 아주 오랜 후에도 우향우 좌향좌 기립해 있을

 당신의 드레스

 서성이고 서성이며 서성이는 드레스

 (당신이나 나나 참,)

 

 비 오는 날의 박물관 100년 간격으로 늘어선 방들

 서성이다 지쳐 빗소리에 열쇠를 꽂는다

 (정거장엔 빈 무덤들,

 100년의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떠도는

 텅 비어 질겨진 드레스들 앞에서

 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군가)

 

 이봐, 나 본 적 있지?

 빗줄기는 저렇게 가는데

 젠장, 빗소리는 왜 이리 질긴 거야,

 두 생애나 밀린 급료를 어디서 받으라고!

 

 박물관 지붕으로 쏟아지는 마른 빗줄기

 헤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멈추었다 떠난다

 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창작과 비평』2011년 봄호

 

 

 

 

  - 1970년 강릉 출생. 강원대 국어교육과 졸업

     1996년 『창작과 비평』 등단

     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도화 아래 잠들다>

     <내 몸속에 잠든이 누구신가> 소설:<나는 춤이다>

     현대문학상, 천상병시상, 이육사문학상, 올해의 작가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