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心의 향기/시詩(필사)

하재연 시 읽기

폴래폴래 2010. 6. 22. 21:38

 

 

   사진:나무와새

 

 

 

    휘파람

 

                          - 하재연  

 

 

 

 그림자들이 여러 개의 색깔로 물든다

 자전거의 은빛 바퀴들이 어둠 속으로 굴러간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길게 부른다

 누가 벤치 옆에

 작은 인형을 두고 갔다

 

 시계탑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는 비둘기,

 공기가

 짧게 흔들린다

 

 벤치, 공원, 저녁과는 상관없이

 

 

 

 

  시집『라디오 데이즈』문지 2006

 

 

 

 

  천국의 계단

 

                             - 하재연

 

 

 

 당신은 발자국 소리가 없어요

 고양이의 영혼

 아이들은 당신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당신에게는 시간이 오래 머물러 있습니다

 나에게서 아주 조금만 가져가준다면

 나는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텐데

 나는 당신의 주름을 가만히 움켜잡고 싶습니다

 내 몸의 빨간 피를 하나하나 응고시키면

 이파리의 물관들처럼 싱싱한 지도가 생기겠지요

 당신은 그냥 나를 지켜봐도 좋습니다

 하나, 둘, 셋 하다가 나는 잠이 들 것입니다

 당신은 마치 거기서 달리려는 것처럼

 

 

 

 

 시집『라디오 데이즈』문지 2006

 

 

 

  동시에

 

                     - 하재연

 

 

 

 그녀는 책장을 넘기고 있었고

 남자가 문 열린 차를 타고 벼랑으로 내달았고

 고양이가 식탁 위의 커피잔을 건드렸고

 양탄자가 약간 들썩거렸고

 고장난 시계 초침이 열두 번을 돌았고

 소년은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고

 그녀는 행운을 빌었으나

 양손이 쪼글쪼글해지고

 머리칼이 가늘어지고

 커피는 쏟아졌고 양탄자는 젖지 않았고

 남자가 녹색 지붕 아래 비행하는 순간

 

 

 

  시집『라디오 데이즈』문지 2006

 

 

 

 

  나비 효과

 

                          - 하재연

 

 

 

 지붕 위에 올라간 돼지들을 보고 있던 어젯밤

 당신은 술 취해 택시 기사와 멱살잡이를 한다

 화면의 폭우는 미칠 듯이 계속되고

 

 집의 주인들은 없다 지붕은 회색이거나 파란색이지만

 돼지들은 어떤 지붕이건 가리지 않고

 흙물은 붉다

 

 한 호랑나비 웃는 얼굴로 날갯짓한다

 그 무늬로 적을 겁주거나

 그 미소로 핀에 꽂히거나

 

 보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의 등을 잘 보아야 한다

 다가서는 순간

 등의 표정은 무너지고 만다

 

 거리에서 나는 늘 추월당한다

 지나쳐온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돼지의 여름과 무관하게

 호랑나비의 여름과 무관하게

 

 새가 아파트 103동과 105동 사이로

 조용히 날아간다

 하늘에는 새의 곡선이 남아 있지 않다

 

 

 

  시집『라디오 데이즈』문지 2006

 

 

 

  시인의 산문(뒷표지 글)

 

 

 먼 나라를 찾아가다 귀찮아진 계절들이 거기 머물렀다. 지구

 어느 편에 있는지 잘 모르는 나라들의 길고 뜨거운 이름들이

 좋았다. 뾰족하고 높은 성을 탈출하던 소녀의 파란 머리카락이

 떠오른다. 창밖으로 치렁하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 그건 소녀

 나 마귀할멈과는 상관없이 살아 움직이며 빛나고 있는 것만 같

 았다. 난 정말로 그 그림을 보았던 걸까. 두고 온 눈동자를 찾

 으러 돌아가면 먼지를 묻히고 굴러다니던 속눈썹이 반짝, 눈을

 떴다가는 책꽂이 사이로 숨어버렸다. 눈 속에 무릎까지 소복소

 복 파묻히며 책장이 넘어갔다.창틀이 정말로 여러 개였다. 한

 개의 창문으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쬘 때 다른 세 개의 창문에

 서는 별이 떴다. 그곳을 눈 내리는 만화가게라고 부른다.

 주석 달지 못한 여러 개의 이름들, 내 시에 섞여 들어와 찰흙처

 럼 몸을 만들어주었다. 이름 따위는 상관없이 내 살이 그 살들

 과 섞여 기분 좋게 물렁물렁해지기를 바란다. 처음과 끝이 어

 디부터 어디쯤인지, 새로 시작된 건 언제인지 기억한다면 많은

 것들이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여권과 비자 없이 국

 경을 넘어 불법 체류자가 되지 않는 나라, 도시, 마을에 대한

 글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상상이 현실에서는 시적이고 정치

 적인 메타포가 된다. 이 상상과 정치 사이, 또는 그걸 넘어 내

 가 가고 싶은 나라의 이름을 언제쯤인가는 써볼 수 있을까.

 

 

 

 

  - 1975년 서울 출생. 고대 국어국문과 同 대학원 박사

     2002년『문학과사회』신인 문학상 등단.

 

 

 

 

 

'詩心의 향기 > 시詩(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간지럼증을 앓는 여자와의 사랑 / 이현승  (0) 2010.06.24
우는 아이 / 이현승  (0) 2010.06.24
정끝별 시 읽기  (0) 2010.06.21
복사꽃 아래 천년 / 배한봉  (0) 2010.06.19
통영 / 김사인  (0) 2010.06.18